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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143. 비내리는 ‘동화 마을’…한 폭의 체스키크룸로프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체스키크룸로프(Cesky Krumlov)로 가는 버스가 9시에 출발이라 아침 8시에 시계탑 앞에서 오언니를 만나기로 했다. 그녀와 그 동행도 오늘 나와 같은 버스를 예매해 놓아서 함께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시계퍼포먼스를 한 번 더 보게 된다. 어제까지 구시가의 광장에 임시 조형물이 세워지고 있어서 뭔가 싶었는데 오늘 프라하 국제 마라톤이 열린다고 한다.

구시가의 고즈넉한 풍경에 임시 바리케이드와 조형물이 설치되는 걸 보면서 메트로를 찾아간다. 동화의 마을이라는 체스키크룸로프로 가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가는 것이다. 일요일이고 행사가 있는 오늘 프라하는 다른 날보다 더 번잡하겠지만 나는 작은 마을로 여행속의 작은 여행을 떠난다.

메트로를 타려고 지하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는 아래로 오랫동안 내려간다. 과거 냉전시대에 지하시설이 방공호로 만들어진 것이라서 그렇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다.

메트로에서 만나는 체코인들의 표정은 무표정하다. 사람들은 아직 두꺼운 무채색의 옷을 입고 무덤덤한 얼굴로 앉아 있다. 며칠 전까지 스페인의 따뜻한 햇살과 밝은 표정의 사람들을 보다 와서 그런지 내게는 그 표정들이 더욱 대비가 된다. ​

드디어 안델역에 도착한다. 신시가지인 안델역에 내리니 대형마트가 보인다. 마트에 들어가 간식거리를 사서 가방에 넣고 체스키크룸로프로 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스튜던트에이전시라는 동유럽의 유명한 버스회사에서 운영하는 노란 버스가 온다. 프라하에서 체스키크룸로프까지는 버스로 세 시간, 왕복 여섯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와이파이가 되고 승무원이 커피와 비스킷을 서빙해주는 버스라 쾌적하다. 이동시간이 지루하지 않은 것은 오랜만에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카톡대화를 하며 가기 때문이다. 세상 참 좋아졌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원하기만 하면 단편적이긴 하지만 어디서든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세상이다.

프라하에서 체스키크룸로프까지 세 시간여를 달리는 동안 창밖이 흐려지더니 비가 후두둑 내린다. 분명 화창한 프라하의 하늘을 보고 출발했건만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비는 더 굵어져 있다. 길도 몰라 난감한데 오늘이 일요일이라 이 버스터미널은 작은 대합실만 열려있고 화장실이고 사무실이고 다 잠겨있어 물어볼 사람도 없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의 목적지가 모두 체스키크룸로프이니 다른 사람들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간다.

과연 버스터미널에서 가까운 곳에 광장이 나온다. 이곳은 중앙광장이다. 13세기에 형성되었다는 광장은 파스텔톤의 중세식 건물들이 아기자기하게 서 있다. 분수대의 조각품은 페스트 퇴치기념으로 세운 것이라니 유럽의 중세도시에 온 것이 실감이 난다.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비가 내렸던 것 빼고는 여행 중에는 날씨 운이 항상 좋았는데 오늘은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비옷을 입거나 우산을 써야할 정도로 내리는 비 탓에 돌아다니는 것이 쉽지 않다. 프라하에서 세 시간이나 걸려서 이곳에 왔으니 비만 피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 개의치 않고 아름다운 마을을 둘러보기로 한다. 

체스키크룸로프는 체코의 남부 보헤미아(Bohemia)지방의 작은 도시다. 보헤미아인들의 예술 감각이 살아있는 기념품 가게들이 줄지어 서있다. 아기자기하고 특이한 기념품들은 너무너무 비싼 가죽제품이기도 하고, 도자기 장식이나 유명한 그림의 모조품, 보석가게, 유명한 체코 맥주만 파는 곳 등등 셀 수도 없다.

손님을 끌기 위한 간판마저도 세상에 하나뿐인 핸드메이드 작품이니 안 들어 갈 수가 없다. 예쁜 건물들과 아기자기한 장식, 하나하나 정성이 배어있는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가는 곳마다 쌓여 있으니 지갑을 열지 않을 수 없다. 마을 전체가 관광객을 위해 만들어 놓은 놀이동산 같지만, 중세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이 도시는 동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이 살아온 곳이다.​

거리를 걷다가 매장에 진열된 물건들을 살펴보며 걸어가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 걸을수록 더 멋진 거리와 아름다운 풍경과 독특하면서도 예술적인 가게들이 튀어나오니 어쩔 수가 없다. 원래 이 도시는 이렇게 걷는 곳이다. 비가 내려도 거리에 우리 같은 여행자는 많다.

화창해도 좋았겠지만 잿빛하늘이 만들어내는 수채화 같은 풍경도 괜찮다. 걸을 수 있을 만큼 내리는 비가 오히려 고맙다. 폭우가 쏟아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이발사의 다리”라는 이름의 다리를 건너 성으로 들어간다. 다리입구에는 프라하의 카를다리에도 있는 얀 네포무크의 조각상이 있다. 조각상의 머리 뒤쪽의 원을 그린 황금별들이 이제는 익숙하다.

체스키크룸로프성은 체코에서는 프라하성 다음으로 큰 성이다. 길을 따라 올라보면 넓은 정원도 여러 개 나타난다. 화창한 날씨였으면 만끽할 수 있을 텐데 비가 오니 발걸음이 무겁지만 성안에서 바라보는 마을풍경은 커다란 위안이 된다.

성 안의 액자에 담긴 체스키크룸로프의 전경을 보면 이곳의 위치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버스나 기차로 들어오는 중앙광장을 비롯한 마을은 굽이치는 물길을 품으며 섬처럼 존재하고 다리를 건너면 어디서나 보이는 탑을 위시한 성이 자리 잡고 있다. 체스키크룸로프라는 도시의 이름도 이 지형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중세의 영주는 언덕위의 성에서 마을을 굽어보고 감탄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행 전에 알고 있던 체스키클롬로프의 이미지는 뾰족한 탑과 빨간 지붕들이 모여 있는 중세의 마을에 블타바강이 휘도는 풍경이었다. 그 이미지가 그대로 눈앞에 펼쳐져있다. 여행이란 한 장의 사진이나 한 페이지의 책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상상을 초월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예상을 빗나가기도 하지만 오늘 체스키크룸로프는 날씨를 뺀다면 상상했던 이미지 바로 그것이다.

시대의 변천을 따라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 각종 양식으로 지어진 성이 잘 보존되었다. 성과 마을이 옛 모습을 간직한 것은 체코가 과거 냉전시대에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발이 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약이 된 경우다. 프라하도 그렇지만 체코의 아름다운 풍경들은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살았던 근현대사를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 이토록 로맨틱한 풍경 속에서 그처럼 건조한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유일하게 남아있는 성곽의 문인 부데요비츠카 문까지 걸어와 빗속의 여행을 끝낸다. 그림 같은 작은 마을에서 며칠쯤 묵으며 휘도는 블라바강과 성을 바라보고 마을을 거닐고 싶다. 동화의 마을이라고 열심히 왔는데 이제는 아예 동화 속에 눌러앉고 싶어진다. 이렇게 스쳐 지나가지 않고 며칠이라도 머무른다면 동화가 아닌 삶이 보일 것이다.

아름다운 마을을 뒤로 하고 버스터미널로 간다. 동행이 있어 걸음도 식사도 기다림도 편하지만 동의를 구해야하는 사소한 모든 일들이 불편하게도 느껴지기도 한다. 진짜 나그네 다 됐다. 돌아갈 날이 성큼 다가왔는데 이제야 크눌프를 이해하게 되다니….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돌아보니 성의 커다란 탑은 어디서나 바로 보인다. 도착했을 때는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더니 마을과 터미널은 지척이다. 일요일의 터미널에는 직원이 한 명도 없어서 프라하로 돌아가는 표를 예매하지 않은 여행자는 발을 동동 구른다. 다행히 돌아가는 버스에 자리가 있어 그녀도 버스에 오른다. 아름다운 체코는 친절하지는 않다. 프라하 관광지의 식당이 바가지를 씌우는 것으로 악명이 높고 환전사기나 소매치기도 조심해야 한다지만 그런 일이야 차치하고라도 외국인 여행자가 많은 정류장에 흔한 안내문 같은 것도 없으니 말이다.



오후 6시에 출발한 버스는 밤 9시 반이 넘어서야 프라하에 도착했고 메트로를 타고 구시가 광장으로 왔을 때는 이미 열시가 넘는 시각이다. 오늘 하루를 함께한 오언니와 그녀의 동행과 허겁지겁 저녁식사를 한다. 프라하를 마지막 여정으로 내일 아침 한국을 향해 떠나는 두 사람은 피로에 지친 얼굴로 한국을 그리워한다. 깜깜해진 광장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그들은 거리 저편으로 사라진다.

낯선 길에서는 어둠이 두렵지만 며칠 지나 익숙해진 길에서는 상념만이 더해질 뿐이다. 이제 여행은 끝을 향해 가고 마음도 여행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다.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다는 것, 지금 여기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을 한국의 지인들보다 가까이 느껴지게 한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도 담담히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인생이든 여행이든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으로 점철된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혼자 낯선 도시를 떠도는 일이 일상이 된 지금이지만, 가슴 한편에서 스멀거리는 외로움 역시 여행에서 뿐 아니라 인생에서도 함께할 것임도 잘 안다.

늦은 시간 호스텔 도미토리에는 한국인 자매들이 새로 짐을 풀고 있다. 한국에서 갓 도착한 여행자들은 나처럼 한국사람이 반갑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간단히 인사만 한다. 씻고 정리하고 쾌적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체코가 공산국가였던 이력 때문인지 프라하는 치안이 좋아 밤에도 안전한데다가, 싸고 화려한 클럽문화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다른 여행지와는 달리 프라하의 호스텔에서는 새벽에 술에 취해 들어오는 사람이 많다. 특히 오늘은 새벽 두 시가 넘어 들어온 남녀가 취기에 목소리를 낮추지 못하고 여러 사람이 잠들어 있는 도미토리에서도 계속 낄낄거리더니 급기야 핸드폰으로 동영상까지 틀어놓고 이야기를 한다. 이런 경우는 별로 없어서 당황스럽지만 도가 지나친 것도 사실이다. 그동안 조용한 동양인 여자로 여행 다니던 내 입에서, 너무 늦었으니 제발 조용히 해달라는 말이 신경질적으로 쏟아져 나온다. 일순간 적막이 감돌고 미안하다는 말을 듣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동화의 마을에 다녀온 하루 치고는 너무도 현실적인 끝맺음이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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