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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리포트] 이태원·홍대‘펍 크롤링’…카페서 커피 마시듯 수제맥주 음미
소규모 양조장서 소량생산한 크래프트 비어
다양한 향·개성 넘치는 맛으로 인기몰이

빨리 마시고 취하는 문화 점점 사라져
젊은층 이어 4050 중장년층도 변화 동참


와인잔처럼 봉긋한 볼을 가진 두 잔에 각각 검은 빛과 붉은 빛이 감도는 맥주가 담겨 있다. 첫 번째 잔을 입에 대자 초콜릿향이 코끝을 감돌다 이내 부드러운 맥주 거품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두 번째 잔을 입에 대자 첫모금에선 은은하게 짠 맛이 느껴지다 그 다음 모금부터 신맛이 피어오른다. 새로운 맛이었다.

지난 3일 오후 7시 서울 이태원 경리단길의 크래프트 비어(수제 맥주) 전문점 ‘맥파이(Magpie)’에서 처음 만난 수제 맥주 ‘발틱 포터(Baltic Porter)’와 ‘고제 사워(Gose Sour)’의 첫인상은 매우 신선했다. 내부 좌석을 채운 손님의 절반가량은 외국인이었다. 이 곳에서 서로의 국적을 구별하는 일은 의미 없어 보였다. 기자와 동행한 배우 박준면은 “입소문 이상으로 맥주의 향과 맛이 좋아 놀랐다. ‘펍 크롤링(여러 수제 맥주 집을 순례하며 다양한 맥주를 맛보는 일)’을 통해 조금 더 다양한 맥주를 맛 보고 싶다”며 다음 장소를 재촉했다.

제조자에 따라 다양한 맛을 내는 수제맥주, 크라프트비어가 젊은 층은 물론 여성과 중장년층의 인기를 끌자 국내 대형 주류업체들도 앞다투어‘ 에일’ 맥주를 선보이는 등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사진은 하이트진로의 주류 전
시장 모습. [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크래프트 비어가 뭐길래=맥주하면 톡 쏘는 황금빛 액체만을 떠올리는 시대는 지났다. 맥주의 계절은 여름이란 말 뒤에도 의문부호가 달라붙기 시작했다. 맥주를 주문할 때 ‘생맥’과 ‘병맥’ 말고도 알아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이는 최근 크래프트 비어가 각광을 받게 됨에 따라 생긴 변화들이다.

크래프트 비어는 1970년대 말 미국양조협회(ABA)가 새롭게 만든 용어로 개인을 포함한 소규모 양조장이 소량 생산(연간 6만 배럴 이하)하는 수제 맥주를 의미한다. 크래프트 비어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한 향과 맛이다. 맥주는 기본 재료 네 가지(물, 맥아, 호프, 효모)로 만들어지지만 비율과 첨가물에 따라 그 향과 맛이 천차만별이다. 지난 7월 팬들을 위해 ‘낮술파티’ 이벤트를 열어 직접 만든 맥주를 대접했던 그룹 미미시스터즈는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맥주를 만들었는데 병마다 다른 향과 맛이 느껴져 놀랐다”며 수제 맥주에 대한 경이로움을 기자에게 표현한 바 있다. 제조자의 수보다 다양한 것이 맥주의 향과 맛인 셈이다.

▶어디서 무엇을 마실까=강남, 이태원, 홍대앞은 국내 크래프트 맥주의 거점이다.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이들 지역에서도 이태원의 경리단길은 크래프트 비어 마니아들의 ‘성지(聖地)’로 꼽힌다. 대형 주류업체의 맥주 독과점 체제에 균열이 생긴 것은 지난 2002년 주세법 개정으로 소규모 영업장에서 직접 맥주를 주조해 팔 수 있게 된 이후부터다. 굽지 않은 맥아를 사용해 만드는 ‘페일 라거(Pale Lager)’가 맥주의 전부인 줄 알았던 주당들에게 독일식 고전 제조방법으로 만든 풍부한 맛과 향의 맥주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최근 들어 수제 맥주를 위탁 양조해 판매하는 일이 가능해져 고가의 맥주 제조 장비를 갖출 필요가 없게 되자 외국인이 몰리는 이태원을 중심으로 수제 맥주 붐이 일어났다. 현재 이태원에는 ‘맥파이’를 비롯해 ‘더 부스’ ‘크래프트웍스 탭 하우스’ ‘사계’ 등 많은 수제 맥주 전문점들이 성업 중이다.

이 같은 국내 맥주 시장의 변화의 중심에는 에일(Ale)이 있다. 효모를 맥주통 아래쪽에서 발효(하면발효)시키는 방식으로 만드는 라거는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 특징이며 저온(9~15도)에서 발효하기 때문에 투명한 빛깔을 가지고 있다. 반면 맥주통 위쪽에서 호모를 발효(상면발효)시키는 에일은 라거보다 상대적으로 고온(18~25도)에서 발효되기 때문에 깊고 무거운 향과 맛이 특징이다. 또한 에일은 발효 과정 중 오렌지, 배 등 과일향이 자연스럽게 생성되기 때문에 라거와는 다른 개성 넘치는 맛을 즐길 수 있다.

맥주를 고르는 요령에 대해 ‘맥파이’ 측은 “많은 종류의 맥주가 있지만 ‘페일 에일’이 처음에 수제 맥주를 접할 때 향도 맛도 가장 무난한 편”이라며 “맥아를 얼마나 구워내느냐에 따라 맛과 향이 변하기 때문에 다양한 맥주를 접하며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을 찾아나가는 것이 요령”이라고 조언했다. 


▶빠른 변화에 중장년층도 동참=그동안 국내 맥주 시장의 절대 다수는 라거(Lager)였다. 지난해 말 기준 약 4조 원에 달하는 국내 맥주시장에서 라거의 점유율은 90% 이상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에일 맥주 수요의 증가에 따라 국내 대형 주류업체들도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9월 하이트진로가 ‘퀸즈에일’을 출시한 데 이어 올해 3월 오비맥주가 ‘에일스톤’을 선보였다. ‘국내 맥주제조 면허 3호’ 세븐브로이가 지난 2012년에 내놓은 에일 맥주 ‘세븐브로이 IPA’는 현재 대형 마트를 통해 판매 중이다.

김진 하이트진로 브랜드매니지먼트팀 과장은 “과거와 비교해 정보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빨라지고 유학 등 해외에 다녀오는 사람들도 늘어나다보니 맥주에 대한 요구도 다양해지고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도 늘어났다”고 시장 변화의 원인을 분석했다.

맥주의 다양화에 따라 빨리 마시고 취하는 문화는 점점 향과 맛을 즐기는 문화로 변화하고 있다. 크래프트 비어 전문점에선 안주를 따로 시키지 않고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맥주를 음미하며 즐기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또한 유행에 민감한 20~30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소비됐던 수제 맥주는 40~50대 중장년층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실제로 기자가 찾은 상당수의 수제 맥주 전문점 내부 좌석은 중장년층 손님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남편, 친구들과 함께 경리단길을 찾은 박애란(60ㆍ여) 씨는 “다양한 맥주를 취하지 않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듯 즐기며 담소를 나눌 수 있어 자주 찾는 편”이라며 “저렴한 가격에 제공되는 4~5잔의 샘플 맥주를 통해 새로운 맥주를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했다.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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