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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종환 시인의 산방 일기, 꽃과 풀들이 전하는 얘기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지난해 초여름, 도종환 시인이 홀로 기거하는 속리산 자락 구구산방을 찾았을 때 눈에 띈 인상적인 장면은 현관 앞 담벼락에 나란히 늘어선 장화들이었다. 목이 긴 장화, 짧은 장화, 빨간 장화, 파란 장화…. 개중엔 흙이 좀 더 묻은 게 있는가 하면, 뻣뻣한 게 새 장화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다. 시인은 웬 장화를 이렇게 다채롭게 장만해둔 걸까, 호기심이 일었지만 묻지 않았다.

도종환 시인의 산방 에세이집 ‘너 없이 어찌 내게 향기 있으랴’(문학의문학)에는 헌 신 얘기가 나온다. 그릇을 씻다가 음식 찌꺼기 남은 걸 버리려고 마당으로 나갈 때, 풀을 뽑으러 텃밭에 갈 때, 창고에 연장을 가지러 갈 때 새 신이 있는데도 헌 신을 신고 간다. 그냥 편하기 때문이다. 일상도 마찬가지다. 중간 중간 빈 시간이 있는 일정, 발을 동동 굴러야 하는 삶보다는 약간 헐렁해 보이지만 담담하게 끌어가는 삶을 시인은 얘기한다.

가령 이런 것이다.

점심 우동 한 그릇을 다 먹고 ‘저자와의 대화’ 행사에 5분 늦게 도착하는 버스를 타느냐, 먹을 만큼만 맛있게 먹고 15분 이른 버스를 타고 10여분의 여유를 갖느냐다. 그런 갈등의 순간, 시인은 먹을 만큼만 먹고 약간의 허기를 음악과 책의 한 줄로 채운다.

“내 앞에 차려진 밥상을 다 먹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내 욕심입니다. 생의 다른 열차를 갈아타야 할 때가 오면 내가 하던 일, 내게 주어진 역할, 내가 다 마치지 못한 책을 남겨두고 우리는 가야 합니다.”(‘남긴 우동’ 중)

시인 도종환
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110613

산방 생활 얘기는 홀로 지내는 삶, 묵언의 생활 속 얘기지만 온갖 생명 있는 것이 나누는 대화로 소란스럽다. 풀과 벌레, 새와 짐승, 꽃과 나비들이 시도 때도 없이 저마다 시인에게 얘기를 건넨다. 시인은 밝은 눈과 귀로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인다. “자기들끼리 모여 무슨 궁리를 하는 바람과 흙과 물방울의 정령들”로 이들을 표현하는 시인은 그들과 통한 듯하다. 시인은 놓칠세라 조심스럽게 그들의 얘기를 듣고 무딘 우리에게 하나하나 전해준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어린 여치의 연둣빛 같은 꽃을 피워올린 가을 난은 향기로 말을 걸어온다. “눈에 잘 뜨이지 않고 어제도 오늘도 평범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다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걸. 다른 꽃 다 지고 겨울까지 남아 향기를 내뿜는 들국화가 들려준 말은 한 편의 시가 된다. “너 없이 어찌/이 쓸쓸한 시절을 견딜 수 있으랴//너 없이 어찌/이 먼 산길이 가을일 수 있으랴//이렇게 늦게 내게 와/이렇게 오래 꽃으로 있는 너//너 없이 어찌/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 향기 있으랴.” 
하얗게 눈 덮인 겨울 산에 핀 빨간 산수유 열매는 깨어 있음을, 산길에 무참히 짓밟힌 꽃은 어린아이와 힘없는 여성들이 끔찍하게 목숨을 잃는 무서운 세상, 현실을 다시금 상기시켜 마음이 아프다.

여린 생명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인의 언어는 연하고 부드럽다. 글 한편 한편마다 꽃향기와 산방의 고즈넉함이 풍겨와 딱딱하게 굳은 마음, 뾰족한 신경이 어느새 물러진다.

시인은 자주 연둣빛 잎에 매혹된다. “연두는 초록의 새끼”라며, 시인은 연두를 아끼고 칭송한다. 연두는 그에게 첫 마음의 순수함, 열심을 일러준다. 그러나 첫 마음을 이어갈 뒷심 역시 중요하다고 시인은 얘기한다.

그가 자연에서 배우는 것은 바로 서기다.

모든 에너지를 안으로 중심으로 모으며 겨울을 나는 빈 겨울나무를 통해 그가 말하는 건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다. “좌우와 아래 위 곁가지로 갈라져 각자 자기 길로 가려는 이들보다 중도가 많아야 합니다. (…) 치우치지 않으면서도 바른 태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자세도 중정이어야 밝고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자연과의 대화, 명상과 사색에서 길어올린 맑은 얘기, 사는 게 너무 힘겹다는 생각이 드는 날, 그가 자연에서 배우고 우리에게 들려주는 얘기들은 사는 일의 이치를 쉽고 밝게 보여준다.

/meelee@heraldcorp.comㆍ사진=헤럴드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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