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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일성주의자’ 는 北인권 대부가 됐는데…
‘강철서신’ 저자 김영환씨 탈북자 돕다 中당국에 구금중…통진당내 ‘종북주의’ 당선자 논란속 사상전향 또 한번 주목
1986년 ‘강철서신’에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은 일제의 막강한
군사력을 정규군도, 국가적 후방도 없는
불리한 여건에서 모든 문제를
자체로 해결하는 20여년간 지속된
간고한 투쟁이었다. 남한의 변혁운동가는
이러한 혁명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1998년 ‘북경서신’에서…
“북한에서는 극심한 통제와 공포정치가
이뤄지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김일성이나
김정일에 대한 경외심 같은 것이
생겨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북한 인민이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로 대한다는 것은 전혀 사실과
부합하지 않으며 가능하지도 않다
.”


남한의 변혁운동가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혁명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1986년 김영환의 ‘강철서신’)

“북한에서는 극심한 통제와 공포정치가 이뤄지고 있다. 북한 인민이 김정일을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로 대한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1998년 김영환의 ‘북경서신’)

북한을 바라보는 양 극단의 시각을 압축적으로 대변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저작권자는 김영환 씨다. 그는 1980년대 주사파의 대부로 불리다 1990년대 북한 인권운동가로 전향, 극단적 선택과 방향 전환으로 주목받았다.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 즉 종북 논란은 반백년을 훌쩍 넘긴 분단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하지만 사회주의 몰락과 북한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논쟁은 시효 만료됐다. 하지만 통합진보당 사태를 계기로 북한과 종북 논란은 유령처럼 되살아나 우리사회에서 가장 핫한 이슈로 떠올랐다.


종북, 간첩,‘김정일 개××’…北 또 다시 핫이슈로

취임 첫해 광우병 촛불에 뜨겁게 덴 이후 가급적 이념적 발언을 피해오던 이명박 대통령이 라디오 연설에서 종북주의를 직접 비판하고 생방송 토론 프로그램에서는 “김정일 개××”라는 욕설이 등장한다. 한물 지난 것으로 여겨졌던 간첩, 종북 등의 용어도 연일 언론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북한을 둘러싼 논란이 새삼 불거진 것은 통합진보당 내 주체사상파 종북세력 파문 때문이다. 당내 비례대표 부정경선 의혹에서 시작된 통진당 사태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분당의 직접적 원인이 됐던 종북 논란으로 치달으면서 북한 전반에 대한 논쟁으로 확대되는 양상이다.

때마침 남한 내 ‘원조 주사파’라는 평가를 받던 김 씨가 북한 인권운동 관련 활동을 하다 중국 당국에 의해 구금된 것도 북한을 둘러싼 논란을 확대하는 데 일조했다. 김 씨는 지난 3월 중국에서 다른 한국인 3명과 함께 체포되면서 다시 뉴스메이커로 떠올랐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적이 있던 김 씨에게 적용된 혐의는 중국의 국가보안법 격인 국가안전위해죄였다.

김 씨의 구금은 장기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가족과 우리 정부는 물론 유럽의회와 인권단체 등 국제사회까지 나서 김 씨 일행의 신속한 석방을 촉구하고 있지만 중국 당국은 영사 및 변호사 접견조차 허용하지 않고 있다. 북한 정보기관이 개입됐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지만 중국 당국이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으면서 미스터리만 증폭되고 있는 상황이다.



‘주체사상의 대부, 남한의 작은 수령’김영환

김 씨는 1986년 ‘강철’이란 필명으로 ‘강철서신’ 시리즈를 제작 배포하며 주체사상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들여왔다. 이 시리즈는 1989년 ‘한 노동운동가가 청년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의 해적판 서적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이후 강철서신은 운동권 사이에서 ‘바이블’로 여겨졌으며, 김 씨 역시 주체사상의 대부이자 남한 내 작은 수령 같은 존재로까지 떠받들어졌다. ‘강철서신’이 북한의 대남 라디오 방송을 정리한 것일 뿐이라는 폄하도 있지만, 주사파가 학생운동의 주류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강철서신’은 1부 학습과 품성, 2부 조직운동, 3부 바른 실천 등 세 부분으로 구성됐다. 김 씨는 1부 학습과 품성을 통해 주체사상 체계와 혁명적 투쟁정신 등 혁명전통의 기본내용과 지도부의 정책을 무조건 접수하고 끝까지 집행하는 혁명가적 사업생활 기풍을 강조했다. 특히 민중을 사랑하고 민중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길 줄 아는 풍부한 인간성으로 정리한 ‘민중적 품성’은 이전의 다른 운동권 이론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내용이었다.

김 씨는 2부 조직운동과 3부 바른 실천에서는 대중조직의 필요성, 특히 전위조직의 중요성과 의식화ㆍ조직화를 통한 선전·선동을 각각 강조했다. 김 씨가 정리한 이 틀은 이후 다른 운동권 이론에서도 기본적인 틀로 수용됐다. 김 씨는 이후 남파 간첩과 접선해 북한노동당에 가입했다. 1991년에는 강화도에서 북한 반잠수정을 타고 황해도 해주로 밀입북해 헬기편으로 묘향산 별장으로 가 김일성을 두 차례 면담하기도 했다. 당시 김일성은 ‘강철서신’을 다 읽어봤다며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김 씨는 방북 뒤 남한에 돌아와서는 최근 통진당 사태와 관련해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서울대 법대 동기생 하영옥 등과 함께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조직했다.


“김정일 폭정 종식”북한민주화 운동 선봉에

그러나 김 씨는 1990년대 중반 극적인 전환을 한다. 김 씨는 1997년 자신이 주도했던 민혁당을 해체하고 1998년 무렵 공개적으로 ‘전향’을 선언했다. 김 씨는 ‘강철서신’의 이름을 패러디한 ‘북경서신’이란 글을 통해 북한의 수령론은 완전한 허구이자 거대한 사기극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전에는 북한이 강한 민족주체성을 지키려 노력하는 등 진보적이라고 느꼈지만 남한의 진보운동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 탈북자의 증언, 주체사상의 도구화 등을 지켜보면서 주체사상과 결별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 씨의 전향은 진보ㆍ보수할 것 없이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당시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던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김 씨의 전향에 대해 “앗, 북극은 알고 보니 춥다. 죄송. 따뜻한 남극으로 갑시다 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김 씨가 북한에 대한 환상만 갖고 있다 환상이 깨지자 대안 없이 북한을 절대 악으로 규정하고 반공ㆍ반북에 몰입한다는 비판도 잇따랐다. 이런 비판은 그나마 온건한 측에 속했다. 김 씨가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출범시킨 날에는 김 씨의 이름과 함께 목이 잘린 쥐가 배달됐다. 2004년에는 친북 성향 사이트에 김 씨의 사진에 빨간 사선이 그어진 사진이 게시되기도 했다.

김 씨는 이후 매년 3~4차례 중국을 방문해 북한 민주화 활동 지원에 주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씨는 지난해 12월 출간된 저서 ‘포스트 김정일’에서 “북한의 민주화는 빠르고 늦고의 차이가 있을 뿐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며 “고통에 빠진 북한 동포를 하루라도 빨리 구출하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길”이라고 역설했다.

김 씨가 중국 당국에 의해 체포 구금된 것 역시 북한 민주화운동 관련 활동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 씨의 선택과 활동을 놓고는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한반도 분단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열정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점만큼은 누구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신대원 기자/shind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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