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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모를 남편·이상한 상사 맘껏 씹으세요
강남·영등포·인천 등 유흥가 중심 ‘토킹바’ 급속확산…다양한 이력의 바텐더와 가감없는 대화로 스트레스 훌~훌
직장·연애·가족고민 등
밤새도록 이야기꽃…
과도한 스킨십·팁은 금물

고시생 고민상담 이야기방이 원조
최근엔‘ 여성전용’급속 증가
비용 하룻밤에 최소 10만원

SNS시대 소통 늘었지만
속얘기 할만한 상대 없는
우리사회의 서글픈 자화상


밤 11시. 한껏 차려 입은 여성 두 명이 붉은색 간판의 ‘여성 전용 토킹바(Talking Bar)’로 들어간다. 어두운 조명,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실내는 이미 빈자리를 찾기 힘들다. 왁자지껄 웃음 너머 벽면에는 아이돌 스타에 버금가는 20대 남성들의 사진이 줄줄이 붙어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종업원 사진이다.

테이블은 모두 바(bar) 형태. 2~3인이 앉을 수 있는 짧은 길이로 분리돼 있다. 바마다 ‘바텐더’라 불리는 종업원이 한 명씩 서빙을 하고 있었다. 바를 사이로 종업원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저마다 모습이 달랐다. 일부는 낄낄댔고 또 다른 이는 속사포처럼 끊임없이 말을 해댔다. 심각한 대화를 하는 듯 진지한 표정의 여성도 보였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이내 점장이 나와 ‘규칙’을 설명했다. 그는 “종업원에게 2차를 요구하거나 필요 이상의 스킨십을 시도하면 퇴장입니다. 팁도 줄 수 없어요”라고 했다. 극기훈련소 교관 같은 단호함이 느껴졌다.

10분간 점장의 일장연설이 끝나자 바텐더들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함께했다. 이들은 유행어를 따라하면서 흥을 돋웠다. 가벼운 댄스로 몸을 풀더니 몸 개그를 선보였다.

술과 함께 여흥이 무르익으면 여성 고객들은 마음을 열고 바텐더들과 본격적인 ‘대화’에 들어간다. 가장 흔하게 오르는 주제는 단연 ‘연애’다. 여성들은 잘 만나주지 않는 애인에 대해 종업원들에게 푸념한다. 그러면 종업원들은 “그런 남자랑 결혼하면 안돼!”라며 ‘남자의 입장’에서 조언한다. 10년 넘게 살아도 속을 모르겠는 남편 얘기도 대화의 단골 메뉴다.

이해가지 않는 직장상사에 대한 뒷담화도 가감없이 토해낸다. 종업원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으며 위로하고 또 조언한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새로운 바텐더가 등장한다. 역시 처음 본 사이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한 바텐더와 밤새 수다를 떠는 것이 아니라 15명이 돌아가며 자리에 앉는다.

저마다 손님을 즐겁게 하는 방식이 다르지만, 방법은 하나다. 바로 대화. 종업원은 “더 친해지면 서로 욕을 하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바텐더 박모 씨는 “손님과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증거”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바를 채운 여성들은 자정이 다 되도록 이야기꽃을 피웠다. 일찍 와서 밤새 앉아있는 여성도 있고, 자정이 넘어서 들어오는 여성도 있었다. 오후 7시에 영업을 시작한 이곳은 다음날 오전 7시까지 손님을 맞았다. 


▶“내 얘길 들어줘” 문전성시 토킹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한 무한소통시대. 하지만 돈을 주고 대화를 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야기 상대를 찾아 ‘토킹바’를 찾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토킹바는 말 그대로 대화를 나누는 곳. 술 한 잔과 함께 종업원이 이야기 상대를 해준다. 성매매 업소와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토킹바가 유흥업소가 아닌 일반음식점으로 등록돼 있는 이유다.

2005년부터 고시촌을 중심으로 생긴 토킹바는 경기불황에도 급증해 현재 강남, 인천, 영등포 등 유흥가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처음 고시촌에 생긴 토킹바는 수험생활에 지친 고시생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한 ‘이야기 방’이었다. 남성들이 주 고객이었다.

하지만 최근엔 여성 전용 토킹바도 늘어나고 있다. 전국에 체인점을 갖고 있는 R 여성 전용 토킹바 홈페이지에는 하루 접속자가 5000명이 넘을 정도다. 게시판에는 ‘어제 너무 즐거웠고, 고마웠다’는 글이 가득하다.

‘대화를 사러 온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한다. 직업도 다양하다. 강남 R 토킹바의 베테랑 직원 김모(25) 씨는 “12살 자녀가 있는 주부부터 20대 대학생까지 손님의 연령대도 다양하고 의사, 변호사 같은 엘리트들도 많이 온다”며 “회사나 가정에서 있었던 다양한 사연들을 편하게 털어놓는다”고 말했다.

자릿세와 음료 값을 포함해 토킹바를 즐기기 위해선 1인당 최소 10만원 이상을 지불해야 한다. 경기 불황시대, 이들은 왜 굳이 돈을 내고 대화의 공간을 찾는 것일까.

남성 전용 토킹바를 자주 간다는 김모(28) 씨는 “연애 얘기, 학교생활 등 친구들에게도 하기 힘든 속얘기를 할 수 있어 찾는다”면서 “바텐더 중에는 명문대에 다니는 사람도 있어서 학교생활에 대한 고민도 잘 이해해준다”고 말했다.

가정주부인 박모(42ㆍ여) 씨는 “남편은 남편대로, 애들은 애들대로 바쁘다. 얘길 나눌 사람이 없다”면서 “여기서 얘길 하고 나면 속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이라고 털어놨다. 회사원 이모(28·여) 씨도 비슷하다. “처음에는 궁금해서 왔지만 퇴근하고 터덜터덜 집에 가기보다 편하게 술 한 잔 하면서 대화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다시 찾게 됐다”며 토킹바에 대한 무한 애정을 드러냈다.

▶토킹바는 우리 사회 ‘불통’(不通)의 증거= 전문가들은 토킹바의 인기 요인에 대해 입을 모아 우리 사회의 ‘소통의 부재’를 지적했다. 소통할 공간이 줄어들면서 ‘돈을 주고 소통을 하는 현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심상용 상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토킹바가 호황인 것은 아직 우리 사회가 가족과 친구 집단 내에서 대화하는 방법을 잘 가르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며 “익명성을 보장받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 위해 나타나는 왜곡된 형태”라고 분석했다. 심 교수는 이어 “SNS로 우리 사회의 소통 창구는 분명 넓어졌지만 사생활이 공개된다는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지 못한다”면서 “지역 공동체와 가족, 친구 등이 모여 상호 대화하고 이해하는 방법을 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현재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교수 역시 “일정한 소득을 가진 사람들 중 외롭고, 말할 사람도 많지 않은 사람들이 친밀한 관계를 위해 토킹바를 찾는 것”이라면서 “이성과 어울리면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싶지만 사회에서 타인의 눈 때문에 조심해야 하는 사람들이 토킹바를 찾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결국 토킹바는 진실한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현대인의 열망의 표현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그린러브의 이정민(31) 상담사는 “20대 중반의 토킹바 직원들이 타인의 인생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데 진실한 대화가 오갈 수 있겠느냐”며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또 “개인들 간에 직접 대화가 단절되면서 ‘대안’이라고 등장한 것이 토킹바”라며 “사회적으로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서지혜 기자 gyelov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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