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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칼럼> 헌 책방에서 만난 어떤 ‘기시감’
불황에 헌 책방 때아닌 호황

알뜰 독서족 위한 해방구로

일본선 체인점 잘나간다지만

개성있는 공간 더 생겼으면…


종로 2가는 예나 지금이나 청춘들의 발길이 가장 붐비는 곳 중 하나다. 이곳에 한때는 소위 삐끼(?)들의 호객행위를 피해가기 어려울 정도로 나이트클럽이 불야성을 이뤘다. 그런 곳 중 하나였을 종로 대로변에 위치한 해커 나이트 클럽이 문을 닫고 그 자리에 한 중고서점이 들어선 건 중년들에게도 이 젊음의 거리에 발을 들일 수 있는 명분 같은 게 생겼다는 묘한 뿌듯함을 줬다.

지난해 추석께 오픈한 이 중고서점이 오픈 6개월 만에 방문객 수가 배로 늘면서 성황이다. 주말에는 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매출이 무려 10배 가까이 늘었으니 이 불황에 그야말로 대박이다.

초등학생 아들과 매장을 찾은 한 주부는 “기대이상이다. 값도 싸고 찾는 책들이 대체로 갖춰져 있어 자주 찾을 것 같다”고 했다.

기자도 최근 ‘구름빵’ 애니메이션에 빠져있는 딸아이에게 주려고 원작 그림책을 구입했다. 원래 정가는 8500원, 중고값은 3500원. 책 상태를 보려 하드커버 책장을 넘기자, 빈 페이지 위쪽에 ‘2008년 3월 14일, 연신문고 with J. S.’라는 단정한 글씨가 보인다. ‘아, 이 책을 내놓은 사람은 은평구 쪽에 사는가 보다. 아이와 함께 샀을 책, 아이는 이제 이런 그림책은 볼 나이가 지났을까?’ 갑자기 어떤 궁금증들이 꼬리를 물기 시작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뭔가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건 다름 아닌 소설가 김애란의 ‘여름의 풍속’이란 글이었다.

이 에세이는 1999년 여름의 어느날, 동기이자 오빠인 B와 함께 고대 앞 헌책방을 순례한 얘기다. 작가는 학교 소파에 앉아 있다가 문득 B에게 헌책방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 B의 자발적 안내로 헌책방을 찾은 작가는 원래 사려던 책 대신 게르하르트의 ‘언어학사’라는 책을 산다. 그리곤 잊고 지내길 몇 년 뒤, 책장을 넘기다 책 주인의 필체와 만난다. 대학 중간고사 기간 표시다. 또 하나 눈길을 뗄 수 없었던 건 두 장의 학교 수강신청서. 서로 연인이었을 책 주인과 남자친구의 수강신청서를 통해 작가는 탐정처럼 그들의 행방을 얼마간 추적해나간다. 인조가죽소파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마치 세포가 시냅스를 형성하듯 끝없이 뻗어간다. 소설가로 산다는 건 바로 사소함을 말똥구리처럼 정성스레 굴려나가는 것, 그래서 마침내 어떤 단단한 구조물을 만들어내는 거란 걸 작가는 깨달은 듯싶다.

헌책방이 불황에 뜨고 있다. 예의 중고서점은 조만간 신촌역 근처에 3호점을 낼 참이다. 신촌에는 오래된 헌책방들이 꽤 있다. ‘북오프’라는 일본 체인점도 요즘 잘 나간다. 일각에선 이런 중고서점 체인에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 동네서점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신간 베스트셀러까지 중고책으로 흘러나오니 그럴 만도 하다. 독자가 책을 사서보고 바로 내놓기도 하지만 출판사 내부, 블로거, 도매상 등 변칙적으로 흘러나오는 것도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는 법으로 규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출판계 안에서 소통하고 풀어야 할 일이다. 한 푼이라도 아껴 책을 사려는 이들, 오래된 책을 찾는 이들에겐 오히려 개성 있는 헌책방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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