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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진영, 가진 것 이상을 도전하는 배우(인터뷰②)
영화 ‘약속’(1998, 감독 김유진)에서는 보스 박신양 곁을 지키는 우직한 동료 엄기탁으로, ‘황산벌’(2003, 감독 이준익)에서는 경상도 사투리를 맛깔나게 구사하는 김유신 장군으로, 또 ‘이태원 살인사건’(2009, 감독 홍기선)에서는 냉철한 판단력과 강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박 검사로 매 작품마다 다양한 변신을 시도한다. 그리고 캐릭터에 최적화된 모습으로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인다.

“모든 작품이 기억에 남고”, “여전히 연기가 어렵다”고 말하는, 연출부 생활을 거쳐 연극으로 데뷔한지 20년이 훌쩍 넘은 배우 정진영. 그가 특별수사본부를 진두지휘하는 경찰서장으로 돌아왔다. 작품마다 또렷한 빛을 발산하는 그이지만, ‘특수본’(감독 황병국)에서는 더욱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 변신, 가진 것 이상의 도전

“‘특수본’은 철저하게 특별수사본부 형사들의 이야기”라는 정진영의 말처럼 경찰서장인 그는 출연 빈도가 그리 높지 않다. 극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의 캐릭터는 극 속에 충분히 녹아들었다. 

“장르영화의 장점이 잘 드러났고, 영화 전체적으로 긴박감 있게 흐른 것 같아 만족스럽습니다. 아쉬운 부분은 딱히 없어요. 이 영화를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제작사와의 인연이죠.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을 같이 했던 영화 제작사 수박과 당시 작품을 어렵게 완성하며 쌓아온 믿음이 있었고, 또 어렵게 부탁을 하더라고요. 작품을 보니 제가 할 배역도 임펙트있고, 열심히 잘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그는 배역과 작품에 대한 흥미, 시나리오의 완성도, 그리고 호흡을 맞추는 배우 등 그동안 해온 다양한 캐릭터만큼이나 작품을 고르는데 있어서도 매번 다른 기준을 제시한다. 그러나 한 가지, 연기하는 자신이 ‘재미’를 느껴야 한다는 것은 확고하다.

“어떤 작품을 선택할 때 이야기의 완성도,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새롭게 도전 할 만한가를 염두에 두죠. 한 번 해봤던 역할을 또 하고 싶지 않고, 매번 변신을 추구합니다”

# 충만한 감성, 멜로는 언제든 환영

실제로 정진영은 조직폭력배에서 장군, 장군에서 왕, 왕에서 평범한 직장인, 그리고 검사, 경찰서장, 최근 의사까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캐릭터에 도전했다. 그러나 수많은 작품을 해온 그도 단 한 가지 못해본 것이 있다. 바로 ‘멜로’, 여배우와의 로맨스.

“멜로요? 욕심이야 당연히 있죠. 진하고 진득한 멜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아마 못할겁니다.(웃음) 강인한 남성 역할은 제의를 많이 받지만 멜로는 기회가 오질 않아요. 지난번 드라마 제작보고회에서 들었는데 장나라씨가 저와 멜로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나야 고맙지(웃음)”

깊이 있는 눈빛과 남성적인 매력을 가진 정진영이라면 충분히 멜로 연기가 가능할 법도 한데 단 한차례 여배우와의 로맨스가 없었다. 또 그런 장르의 시나리오 역시 들어오지 않는다고 소탈하게 웃어 보이는 그다. 아마 충무로의 길을 연 ‘약속’에서 워낙 강한 캐릭터를 맡았기 때문은 아닐까.

“‘약속’의 엄기탁이라는 강직한 역할에 제의를 받고, 흔쾌히 하겠다고 했죠. 전에는 연출부 생활을 했었는데 그저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연극과 영화 등 연기의 길로 접어들기 전 정진영은 연출부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다. 때문에 누구보다 현장의 고단함, 스태프들의 노고를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배우들을 위해 주변에서 그만큼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는 정진영. 하지만 연출에 대한 욕심에는 “제 능력 밖입니다”라고 단호히 말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 길이 내 길’이라고 느끼며 걸어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저는 우연한 기회, 뜻밖의 운으로 고맙게도 배우로 살아가고 있죠. 30대 중반 늦은 나이에 영화계에 입문해 ‘직업배우’로의 정체성은 삼십대 후반 정도부터 갖게 된 것 같습니다”

# 버거움을 즐기는, 발전하는 배우

적지 않은 나이에 충무로에 뛰어들었지만 그간 연극 무대를 통해 꾸준히 연기에 관한 다양한 스펙트럼, 내공 같은 것이 쌓였을 법도 한데 정진영은 “여전히 연기는 힘들다”고 말한다.

“모든 일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일이 쉬워지고 흔히 ‘눈 감고도 한다’라면 관둬야죠. 대충해도 되고 자극이 없다면 의미가 없지 않을까요? 스스로 어떤 일을 할 때 힘에 부치는 마음으로, 자기가 가진 것 이상을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늘 어려워야 마땅하죠. 저 역시도 연기할 때 항상 고민합니다. 버거워하는 것을 즐기는 거예요”

늘 고민하고 그려낸 작품, 그리고 그 속에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기까지 버거웠던 만큼 잔상이 오래남느냐,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작품이 기억에 남아요. 하지만 사실 저는 하나의 작품을 끝내고 그 다음 작품, 그러니까 마지막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죠. 새로운 인물에 빠져들면 전 작품들은 옛 연인이 돼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브레인’이 뜨거운 나의 연인입니다(웃음)”

하지만 이런 그에게도 유난히 빠져나오기 힘든 작품이 있었다.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2005)의 연산군이다.

“괴로운 캐릭터일수록 더 빨리 빠져 나오려고 노력하지만 힘들죠. ‘왕의 남자’의 연산군이 그랬습니다. 어려운 심성을 가진 연산군”하며 당시의 감회에 젖어드는지 약간의 침묵이 있기도 했지만 이내 그는 “힘든 연애를 하면 그만큼 잊기 힘든 것처럼 이 역시도 마찬가지예요(웃음)”

어려운 캐릭터를 ‘힘든 연애’, 지나간 작품을 ‘옛 연인’, 그리고 현재 출연 중인 드라마는 ‘뜨거운 연인’이라고 말하는 정진영. 모든 것을 사랑의 감정에 비유하는 그에게 어째서 멜로가 들어오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배우가 서야할 위치와 작품 속 캐릭터의 자리를 명확하게 꿰뚫고 있는 정진영의 배우로서의 탁월함은 이번 영화를 통해서 빛을 발했다. “황두수는 원하는 바가 분명한 캐릭터”라는 그의 말처럼 배우 정진영도 배우로서 원하는 바가 뚜렷했다.

“연기자는 일상 속에서도 통찰력과 상상력을 필요로 합니다. 배역에 필요한 조각을 모으고, 또 어떤 작품에 들어가기 전 계속해서 감성의 씨앗을 얻는거죠. 배우의 의무는 최선의 연기를 만들어 관객들에게 선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연기자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최고의 조건을 만들어주죠. 간혹 힘든 것이 있더라도 그것을 견디고 이겨내며 함께 만들어 가야합니다. 배우는 결국 집의 마감재처럼 훤히 드러나는데, 현장 스태프를 포함한 동료 배우들이 튼튼한 골조 역할을 해주거든요. 그러니까 마감재만 예쁘면 튼튼한 골조와 함께 잘 어울리게 될 겁니다”

‘특수본’을 마치고 KBS2 월화드라마 ‘브레인’으로 “뜨거운 사랑” 중인 정진영. 배우로서의 소신과 열정, 그리고 모두를 아우를 줄 아는 겸손함까지 갖춘 그의 마지막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김하진 이슈팀 기자 / hajin@issu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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