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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 박철민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염상구를 미치도록 연기해보고 싶었던 전라도 광주출신의 대학생이자 배우지망생이 있었다. “다혈질에 잔인하고 악랄하며 더럽고 비겁한 인물, 그러나 형(염상진)의 시신을 들고 칼부림으로 지켜냈던 뜨거운 피, 이런 인물 만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싶게 간절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태백산맥’은 엄두도 못 내고 지켜봐야만 했다. “너무 초라한 무명의 초짜 배우였기 때문에 그저 억울하고 화나고 부럽고 훼방놓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20여년 후, 그는 한국영화에서 가장 바쁜 배우가 됐다. 박철민(44)이다.

“메뚜기도 한철이잖아요? 눈물나도록 뭔가는 해보고 싶었는데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때를 경험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 갈증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원하는 순간, 저와 같이 하고싶어하는 분들이 계신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최근작은 31일 개봉하는 영화 ‘위험한 상견례’. 지난해부터 따지자면 ‘시라노 연애조작단’ ‘7광구’ ‘수상한 고객들’에 출연했고, 드라마로는 ‘성균관스캔들’과 ‘부자의 탄생’이 있었다. 영화 ‘투혼’과 또 다른 드라마 촬영도 앞두고 있다. 그는 지금 충무로에서 가장 많은 시나리오를 받는 배우다. 박철민은 “제안을 받는 열 편 중 세 편은 못 한다”며 “오늘도 또 한 편 거절하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아직 겨울의 시샘이 끝나지 않은 3월의 봄날, 서울 삼청동에서 가진 인터뷰에서였다.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 수상보다 빛났던 시상소감

지난해말, 수차례 열렸던 각종 영화제 시상식을 TV로 지켜봤던 관객들이라면 수상작과 수상자는 잊어도 박철민의 ‘시상소감’만큼은 기억할 것이다. “외모로 승부하는 배우 박철민”으로 시작해 “이런 시상의 영광을 준 분들께 감사하고 더욱 노력해 주연상, 작품상을 시상하는 배우가 되겠다”로 이어지는 발언은 폭소를 자아내며 세간의 화제가 됐다.

“거제도에서 ‘위험한 상견례’ 촬영하고 있을 때 시상식 참석 연락을 받았어요. ‘후보로도 안 올랐는데, ×팔리게 가, 말어?’ 하는데 영화사에선 가서 작품 얘기 한마디라도 하라고 했죠. 그런데 저는 그게 제일 추접스럽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럼 재미있게 해볼까, 나야 뭐 늘 수상에선 열외니까 아예 ‘시상소감’이나 한마디 해볼까, 연습삼아 농담으로 던졌더니 주변에서 재미있다고들 난리가 났죠.”

돌이켜보면 영화에서 그의 연기인생 자체가 ‘수상자보다 빛나는 시상자’ 같았다.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라는 대사를 유행시키며 그로서는 출세작이 된 ‘목포는 항구다’부터 20여편의 영화, 드라마에서 그는 한결같이 조연을 맡아 막강 ‘신 스틸러’로서의 위력을 보여줬다. 그라고 주연이 하고 싶지 않을까?

“솔직하게 말해봅시다. 기자님 같으면 40억원짜리 영화를 찍는 데 제가 주연을 맡은 작품에 투자하고 싶겠습니까? 내 크기가 크다 작다가 아니라 제 위치가 다른 거죠. 훨씬 싱싱해 보이잖아요? 주연을 거들다가 빛나는 지금 자리가 너무 좋고. 양념이나 감초로 들어가서 찧고 까불고 내 캐릭터를 빛나게 하는 게 저한테 맞는 색깔과 향기가 아닐까 싶어요.”

▶청춘이 뜨거웠기에 빛나는 중년, 아프고 힘들었기에 더욱 맛깔진 희극

어느 누구의 청춘이 안 그랬겠냐만 박철민도 가난했지만 뜨거운 피를 가진 젊은이였다. 중앙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그는 연극동아리에서 활동하는 한편 총학생회장도 지냈다. 대학 졸업 후엔 노동극단에서 5~6년 이상 연기를 했고, 대규모 집회에서 단골로 마이크를 잡았다.

“그 때 뜨거웠던 열정은 식고, 감정은 중화되고, 시선은 보수화됐죠. 그래도 세상을 보는 근본적인 시각은 여전히 유효하고 꿈꾸던 세상에 대한 지향은 미지근하게나마 남아있지 않겠습니까? 특정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회가 더불어 같이 사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몫은 하고 싶습니다.”

그는 92년 연극을 하던 동료와 만나 결혼했고, 배우로서 각광을 받으며 비로소 ‘가장’ 역할을 하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중반에 와서다. 그동안 아내가 생계를 버티며 두 딸을 키웠다. 2남2녀 중에 막내로 태어난 그는 “정통 연극배우였던 형”을 따랐다. “어린 나를 뒷뜰에 앉혀놓고 모노드라마를 보여주던 형은 멘토였고 절대자였으며 큰 그늘이었다”고 했다. KBS성우로도 활동하던 형 박경민씨는 1990년대 중반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형님 돌아가셨을 당시는 방황도 많이 했죠. 지금은 형에 대한 그리움이 많이 옅어졌어요. 안타깝죠. 그게 삶이 아닐까. 죽은 자의 자리는 옅어지고 산 자들은 부여잡고 매달리다가 또 그렇게 사라져가고. 형이 살아계신다면 지금 저를 봐도 그러겠죠. 그게 연기냐고. 나야 잡스러운 연기고 잡놈 연기지.”

박철민은 “언젠가 상받으면 불현듯 형님이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라며 “형님을 기리는 자리가 한번은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마침 ‘위험한 상견례’에서 공연한 김흥수는 형과 절친한 동료였다. 박철민이 “그런 양반을 만나면 술자리가 깊어지지”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걸죽한 전라도 사투리와 입심에 마당극으로 다져진 해학과 순발력의 배우, 박철민은 여전히 웃긴다. 가난했지만 뜨거웠던 청춘과 삶의 아픔과 역경이 있었기에 그의 희극이 더 빛나는 것이 아닐까.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사진=박해묵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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