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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책> 소설을 통해 본 전쟁의 아픔
“행복하다는 것, 그것은 기억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불행했을까? 모르겠다. 다만 어느날 잠에서 깨어나 배불리 먹을 때의 충족감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마침내 깨닫게 되었음을 기억할 뿐. 새하얗고 부드럽고 향기롭던 그 빵, 내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가던 그 생선기름, 그 소금…. 바로 그 순간, 나는 살기 시작한다. 잿빛 세월에서 빠져 나와 환한 빛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존재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르 클레지오가 노벨상 수상과 함께 내놓아 화제가 된 ‘허기의 간주곡’(문학동네)은 허기와 기억이 서로 줄을 잇대고 있다고 본다.

르 클레지오는 2차 세계대전, 파리를 배경으로 브루주아 가족의 몰락 얘기를 통해 파리 벨디브 자전거 경기장에서 벌어진 유대인 인간청소사건 같은 어두운 집단적 망각의 문을 열어젖힌다.

지금 지구촌 곳곳에서 분쟁과 전쟁으로 개인의 형용한 꿈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있지만 이내 잊혀지고 묻히는 현실에 작가들은 눈 감지 않고 기억의 창고를 두드린다.

르 클레지오의 ‘허기의 간주곡’은 전쟁과 혁명의 중심부로 들어가는 대신 브루주아 출신 스무살 에텔의 의식의 흐름을 좇아간다. 마치 나른한 오후 낮잠에 깃드는 봄바람처럼 슬그머니 기억의 창을 열어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기억을 끌어올린다.

고요한 침묵을 깨는 한 가닥 선율이 점차 격렬한 외침으로 바뀌는 볼레로처럼 포슬포슬한 빵의 부드러움과 향기는 몰락 직전의 코탕탱가 살롱의 비속함과 허영 속으로 파고들고, 아버지의 불륜과 어머니와의 불화, 집의 파산, 전쟁과 피난, 쓰레기통 속을 뒤져 음식을 찾아 허기를 채우는 나락으로 몰아간다. 갑자기 세상과 맞닥뜨린 에텔은 온실 속의 꽃에서 가족을 이끌고 비바람을 거뜬히 이겨내는 질긴 들꽃으로 변한다.

르 클레지오는 허기나 광기 그 자체를 비추기보다 그것이 만들어내는 버석버석한 껍데기를 보여주는 데 앵글을 맞춘다. 날지 못하는 자신의 비행기 모형처럼 전락한 무기력한 아버지, 옛 식민지에 대한 향수에 젖어 생을 마감한 종조부, 오페레타 가수에서 걸인이 된 모드, 천박하고 심술궂은 여자로 변한 제니아는 주어진 역사 속에서 개인은 어떻게 자기 생을 만들어나가는지 보여준다.

2010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신작 ‘나쁜 소녀의 짓궂음’(문학동네)은 바르가스 특유의 신랄한 풍자나 유머의 맛은 없다. 그가 줄곧 천착해온 역사ㆍ정치적 문제도 직접적이기보다 역사의 무대와 풍습을 배경처럼 깔아놓는 식이다.

독재정권 치하에서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요구와 열망이 좌절되는 1960~80년대 페루, 유럽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던 1960년대 파리, 히피 문화가 꽃핀 1970년대의 런던 그리고 도쿄까지 20세기 사회의 주무대를 흘러가며 나쁜소녀와 리카르도의 어긋난 사랑은 만났다 헤어지길 반복하며 펼쳐진다. ‘나쁜 소녀’는 현대판 ‘마담 보바리’로 불리기도 한다. 칠레 소녀에서 게릴라 전사 아를레테, 프랑스 외교관 아르누 부인, 영국 사업가의 아내 리처드슨 부인, 야쿠자 우두머리의 애인 구리코 등 가짜 이력으로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며 벌이는 애정행각과 비참한 종말에서다.

현대 캐나다 문학을 이끄는 여성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부커상 수상작 ‘눈먼 암살자’(민음사)는 개인이 겪은 실질적인 기억과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재단된 공적 기록의 차이를 통해 가려진 역사를 조명한다.

1차 세계대전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캐나다에 결정적인 독립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영광스러운 전쟁으로 기록되지만 실제로 참전해 부상을 입고 두 동생을 잃은 아이리스의 아버지에게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그는 전쟁의 잔혹함과 무의미한 살상을 조장하고 무마하려는 애국주의에 정면으로 맞서 고장 난 총을 든 지친 병사의 동상을 만든다.

이는 아이리스와 동생의 개인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이리스의 회고와 동생 로라의 사후 소설 ‘눈먼 암살자’가 교차되며 펼쳐지는 소설은 두 상류층 집안이 두 번의 세계대전과 대공황, 스페인 내전과 같은 국내외 정치적ㆍ경제적ㆍ이념적 변화에 의해 어떻게 흔들리는지 보여준다. 작가는 또 빈부격차와 자본주의의 타락, 전쟁의 잔인함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소설 ‘눈먼 암살자’ 속 공상과학적 틀을 빌려 거침없이 쏟아낸다.

현재 유니세프 특사로 활동하고 있는 마리아투 카마라의 ‘망고 한 조각’(내인생의책)은 시에라리온의 시골 소녀였던 마리아투가 직접 겪은 전쟁의 참화다. 친구와 깡통말을 타는 걸 좋아하고 함께 밭일하며 놀았던 무사와 결혼해 알콩달콩 사는 걸 꿈꾸었던 소녀는 반군에 의해 두 손이 잘려나가고 수용소에서 난데없는 임신소식을 듣게 된다. 마리아투는 어린 나이에 엄마가 돼 구걸하며 살아보려 하지만 1년 만에 아이를 저 세상으로 보내고 자살시도와 좌절 끝에 캐나다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공기와 같이 평소에 느끼지 못하는 작은 평화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순간에 깨지면서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가는 이야기는 더이상 남의 일만은 아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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