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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화영의 골프장 인문학 30] 고색창연한 리비에라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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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하우스 2층에서 내려다보면 멀찌기 태평양 수평선이 하늘과 맞닿아 보였다. 아래가 18번 홀 그린이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남화영 기자] 1927년 개장 이후 매년 봄꽃이 필 때면 미국 캘리포니아 퍼시픽 팰리사이드 해안에 인접한 리비에라컨트리클럽(파71, 7112야드)은 미국프로골프(PGA)투어를 개최해왔다.

초창기에는 LA오픈으로 시작해 닛산오픈과 노던트러스트를 지나 오늘날 제네시스오픈으로 이름이 바뀌어 열리는 이 대회는 미국 PGA투어 선수와 골퍼들에겐 캘리포니아 드림이다. 선수들은 우승을, 골퍼들은 멋진 코스에서의 라운드를 꿈꾼다.

LA에 좋은 코스는 수없이 많다. 유명한 코스로는 벨에어, LA, 트럼프내셔널, 란초 팔로버디스, 펠리칸힐스 등이 있지만, 그중에 해안과 산타모니카 계곡이 만나는 최고의 명당 자리에 앉혀진 코스가 리비에라다. 지난 2월 <골프다이제스트>에서 리비에라를 ‘미국 100대 코스’ 중 23위에 선정했는데 당연한 결과다.

나는 수년 전 큰 행운을 얻어 리비에라 골프장을 취재했고, 당시 노던트러스트오픈이던 대회를 끝까지 다 보았으며 대회를 마친 다음날은 코스 세팅 그대로 라운드까지 해보는 호사를 누렸다. 그야말로 꿈같은 나날이었지만,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린은 살벌했고 코스는 아름다웠고 내 스코어는 엉망이었지만 행복했던 기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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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번 홀에서 본 이탈리아 토스카나풍의 클럽하우스.


태평양 음미하며 봄맞이하던 곳
프랑스 남동부와 이탈리아 북서부에 걸치는 지중해 연안이 이탈리아어로 ‘해안’이라는 뜻의 리비에라다. 롱비치, 산타모니카, 말리부 등 태평양의 멋진 해안선을 가진 미국 캘리포니아의 리비에라CC 클럽하우스 2층 베란다에서는 수평선이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이룬 멋진 광경을 볼 수 있다.

멀리는 바다 아니면 하늘이고 밑으로 내려보면 울창한 아름드리 녹음(綠陰)사이로 필드가 펼쳐진다. 바다가 지척인 데다 산타 모니카 산이 북풍을 막아 겨울에도 춥지 않은 리조트여서 골프장 이름을 리비에라로 지었나 보다.

마마스&파파스의 히트곡 ‘캘리포니아 드리밍’의 가사처럼, 영화 <중경삼림>에서처럼, 잿빛 하늘과 겨울의 나날을 다 보내고 봄기운이 샘솟고, 일상의 탈출구를 원할 때 꿈처럼 그려지는 골프의 이상향이 리비에라인지 모른다.

할리우드가 지척이라 월드 스타들이 이곳에서 라운드 하는 건 일상 다반사다. 그리고 유구한 코스 역사만큼 LA를 대표하는 PGA투어가 매년 이맘때 열린다. 현장에서 선수들을 보면 ‘저렇게 멋진 코스에서 나도 그림 같은 샷을 날려보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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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하우스에서는 골프장 전통과 대회 역사에서 나온 기념품을 진열해두고 있었다.


선수와 스타의 자취 어린 역사
세계 1차 대전이 끝나면서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에서는 골프붐이 일면서 코스들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1922년 LA의 스포츠클럽 부회장인 프랭크 A.가버트는 골프장 부지를 물색하다가 석유업계의 백만장자인 알폰조 벨과 합작해 산타모니카 계곡을 사들였다. 그리곤 막 벨에어CC 공사를 마친 촉망받던 코스 설계가 조지 토마스에게 ‘백지수표’를 주면서 최고급 코스 설계를 주문했다.

토마스는 공사 감독 윌리엄 P. 벨과 함께 설계와 공사를 서둘러 1926년에 완공했다. 15개 홀이 마무리됐을 무렵 훗날 오거스타내셔널과 사이프러스포인트를 설계한 앨리스터 매킨지가 방문해서 “지금까지 본 중 최고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극단을 이룬 코스”라 극찬했다.

설계가 토마스가 백지수표를 받았던 만큼 골프장 공사비는 24만3872달러가 들었는데 당시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비싸게 만들어진 코스였다. 그랜드 오픈은 27년 6월24일했다. 이듬해 개장한 클럽하우스는 30개의 객실을 가져 ‘골프의 그랜드호텔’로 불렸다. 초창기 골프장 옆에는 폴로클럽과 마상마술센터까지 조성된 초호화 리조트였다.

골프장 운영을 맡았던 더글러스 페어뱅크는 초창기부터 ‘골프장 마케팅’을 펼쳤다. 할리우드 스타들을 두루 코스에 초청했을 뿐 아니라 ‘이 코스에서 70타를 깨면 1000달러 준다’는 이벤트를 열어 전국적인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골프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보비 존스마저도 여기에 참가했다. 하지만 73타를 치고는 자존심 상한 듯 뼈있는 한마디를 남겼다. “좋은 코스군요. 그런데 멤버들은 대체 어디서 라운드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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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하우스 옥탑 전망대에는 선수들이 남긴 코스에 대한 명언이 목판으로 새겨져 있다.


LA오픈으로 주목받다
본격적으로 코스가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는 LA의 오피니언리더 모임인 청년상공회의소가 총 상금 1만 달러를 걸고 1929년에 제 4회 LA오픈을 이곳으로 유치하면서부터다. 당시 맥도널드 스미스가 285타로 우승했다. 그리고 LA오픈은 올해로 개최 횟수로는 93회를 맞았지만 그중에 56번을 리비에라에서 개최했다. 총 11개 코스 중에 이곳이 LA지역의 대표적인 개최지였다는 의미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국이 해방하던 1945년. 한 해에만 PGA투어 18승을 거둔 바이런 넬슨이 우승하지 못한 유일한 대회가 LA오픈이었다. 아쉬움이 남았던 넬슨은 이듬해인 46년에 이 대회에 출전해 우승한 뒤로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고향 텍사스로 낙향해 농장을 열었다. 넬슨은 나중에 회고했다. “리비에라가 미국에서 위대한 코스라고 늘 생각했다. 30~40년대 여기서 열린 LA오픈이 메이저 대회만큼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비에라와 가장 인연 깊은 골퍼를 꼽으라면 벤 호건이다. 그는 47년 이 코스에서 열린 LA오픈에서 우승하더니 이듬해 LA오픈과 US오픈까지 연달아 제패하면서 18개월 동안 한 코스에서만 3승을 쌓았다. 이후 리비에라는 ‘호건의 오솔길(Hogan's Alley)’이란 별칭을 얻었다. 호건의 동상이 클럽하우스 후원에 세워진 이유다. 특히 48년에 열린 US오픈은 종전까지 미국 동부에서만 열리던 골프 대회의 전통을 깨고 ‘서부의 루키 발굴’이라는 명제를 걸고 옮겨온 첫 번째 메이저 대회여서 더욱 관심을 끌었다.

리비에라CC는 50년대에는 할리우드 영화 무대로도 자주 활용되었다. 51년 벤 호건이 차 사고를 당해 죽음의 고비를 넘고 재활해 대회 우승을 이어간 실화를 영화화한 <태양을 따라서(Follow The Sun)>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캐서린 헵번과 스펜서 트래이시가 주연한 ‘팻앤마이크’와 ‘캐디’, ‘마크오브조로’의 무대였으며 TV시리즈인 ‘베트맨 로빈’도 리비에라에서 촬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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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 홀그린과 험프리 보거트의 오른쪽 끝 나무.


험프리 보가트의 추억
토스카나풍 클럽하우스 뿐만 아니라 코스 구석구석이 당대 스타들의 추억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12번 홀 그린 오른쪽의 높은 무화과는 영화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가 LA오픈을 관전하던 자리여서 ‘보기의 나무’로 불린다. 보가트는 간이 의자에 앉아 보온병에 짐빔 위스키를 챙겨와 대회를 지켜보곤 했다. 바닷바람이 살랑거리고 볕드는 양지에서 위스키를 홀짝거리며 선수들이 그린에서 좌절하던 걸 음미하던 터프가이의 모습이 연상된다.

리비에라는 1983년에는 두 번째로 메이저 대회 PGA챔피언십을 유치했다. 25살 신예 할 서튼이 잭 니클라우스를 한 타차로 물리치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그런가 하면 1985년 LA오픈에서는 래니 왓킨스가 63, 64타를 치면서 라운드 최저타 기록을 갈아치웠고, 최종 264타로 2위 할 서튼을 7타차로 누르고 역대 최저타 기록까지 작성했다.

1980년대 후반 일본이 최고의 호황을 누리면서 뉴욕 록펠러센터나 페블비치를 사들이던 시절, 리비에라는 일본 자본에 팔렸다. 1989년 일본의 부동산, 웨딩사업가인 와타나베 노보루 회장이 골프장을 매입하자 초기엔 ‘LA오픈이 열리는 미국의 전통 코스를 일본에 팔았다’는 여론이 높았다. 하지만 와타나베 회장은 리비에라의 전통을 보전한다는 원칙을 세웠고, 대회도 계속 유치하겠다는 의지를 실현하면서 원성은 수그러들었다.

존폐 기로에 놓였던 LA오픈은 이후 일본 자동차회사인 닛산이 메인 스폰서가 되면서 닛산LA오픈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이후 20여 년간 닛산오픈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1995년에는 메이저인 PGA챔피언십이 한 번 더 열렸고, 98년에는 US시니어오픈까지 개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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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호건 동상과 호건의 오솔길 기념비가 코스 입구에 설치되어 있다.


호건의 오솔길 코스
2008년부터는 시카고에 본사를 둔 금융그룹인 노던트러스트가 메인 스폰서가 되었고 대회 명칭은 노던트러스트오픈으로 바뀌었다. 첫해와 이듬해 필 미켈슨이 우승했고 2014년부터 2년 주기로 버바 왓슨이 지난해까지 통산 3승을 달성했다. 2015년에는 재미교포 제임스 한(한재웅)이 우승하기도 했다. 2017년부터는 현대자동차가 메인 스폰서가 된 제네시스오픈이 열리고 있다.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면 리비에라 코스는 바이런 넬슨, 벤 호건에서부터, 조니 밀러, 닉 팔도, 프레드 커플스를 거쳐 필 미켈슨, 버바 왓슨까지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우승컵을 두고 다퉜던 고색창연한 전장이다.

물론 ‘골프황제’ 타이거 우즈는 이 코스에서 어렸을 적에 초청되어 경기하고 프로가 되어서도 자주 출전했지만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이제는 우즈 재단이 이 대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내년부터는 인비테이셔널로 바꾸고 상금도 높이는 대회로 격상시킨다고 한다. 아놀드 파머, 잭 니클라우스가 자신의 이름을 건 인비테이셔널을 가졌듯이 우즈도 이 대회를 그렇게 만들려 하는지도 모른다.

리비에라에는 찰리 채플린, 험프리 보가트, 빌리 크리스탈, 캐서린 햅번, 래리 데이비드, 데니스 호퍼. 실베스타 스텔론이 회원이나 게스트로 찾았고 할리우드의 숱한 영화가 만들어졌다. 일본 자본에 인수된 뒤로는 일본의 국민배우인 와타나베 겐,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스즈키 이치로가 여기서 결혼식도 올렸다. 이제는 한국의 스폰서에 우즈가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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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골프장을 사들인 일본의 부동산 재벌 와타나베 노보루 회장.


백발 신사 와타나베 회장
리비에라를 인수한 와타나베 노보루 회장은 점잖은 백발 신사다. 대학 시절 이 코스에서 라운드하고는 ‘멤버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고, 나중에 웨딩사업과 부동산업으로 큰 돈을 벌어 40대 초반에 이 골프장을 인수하면서 캘리포니아 드림을 이뤘다. “제가 해온 일은 설계자가 만든 좋은 코스를 잘 보존하는 것, 그리고 이제 할 일은 골프장을 잘 가꾸어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것이죠.” 수년 전에 만났던 그의 친절함은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좋다.

클럽하우스 2층 VIP응접실에는 골프장 초기 설계도와 클럽하우스 도면까지 액자에 걸어두고 있었다. 리비에라는 38년 대홍수를 맞아 한 귀퉁이가 쓸려나가 대대적으로 리노베이션을 했고, 와타나베 회장이 인수한 후에도 코스를 손봤지만 언제까지나 설계자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한 변용이었다.

와타나베 회장은 리비에라의 미래상을 글로벌에 두었다. LA에 기반을 둔 골프장으로 골프, 테니스, 문화를 통해 미국과 아시아가 긴밀하게 연결되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은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그래서 ‘한국에도 자신의 이상과 부합되는 회원이 있을런지’ 내게 물었다. 나는 당시 ‘분명히 있고 희망적’이라고 답했다.

리비에라 클럽하우스에는 30실의 객실이 있다. 거기에는 벤 호건이름이 붙여진 객실이 있고, 월트 디즈니 실도 있다. 84년 전의 골조와 뼈대는 유지하면서도 최신 시설과 기기가 합쳐지면서 고아(古雅)한 느낌마저 풍겼다. 오크통에 오래 숙성된 위스키가 주는 것 같은 매력이 있다. 세월을 거슬러 역사 속의 인물과 현재를 연결한 이 골프장이 공간적으로 미국과 일본과 아시아를 연결하려 했었다. 리비에라이기에 가능한 캘리포니아 드림이었다고 생각한다.

예전 노던트러스트오픈를 취재하면서 나는 미국 사회에서 골프대회란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축제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우선 이 대회는 오랜 역사를 지닌만큼 LA 지역사회에의 환원이 대회의 최고 가치로 여겨진다. 대회 수익금으로 빈곤 가정 어린이를 돕거나 교육 프로그램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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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애런 배들리가 우승한 시상식에서 제리 웨스트 등 LA의 거물들이 자리해 우승자를 축하해주었다.


지역사회가 함께하는 대회
여기에 지역 명사가 참여한다. 흥행과 진행을 맡은 총감독은 제리 웨스트다. 프로농구단 LA레이커스 대표 선수로 60~74년을 뛴 그는 LA체육계의 거물이다. 오늘날 NBA 로고도 그의 플레이하는 실루엣을 본따 만들었을 정도다. 그는 LA주니어상공회의소 멤버들을 통해 이 대회를 도시의 축제로 발전시켰다. 대회가 열리기 한 달 전부터 산타모니카 부두 등에서 이벤트를 열어 대회 열기를 높였다. 대회가 열리면 마치 LA의 도시 축제와 같아진다. LA시장이 시상식장에 나와 감사의 인사를 하기도 했다.

이 대회는 다양한 이들이 자발적으로 봉사에 나선다. 회원 가족들이 대회에 자원봉사를 했다. 중학생처럼 보이는 어린 아이도 홀의 각 구석을 배정받아 사람들을 통제하고 질서를 유지했다. 이는 경호원이 갤러리를 통제하는 국내 골프 대회와는 반대되는 모습이었다.

대회장은 마을 축제장 같았다. 그로브라 불리는 곳은 놀이공원의 먹거리 장터 분위기를 풍겼다. 마스터즈에 피멘토치즈샌드위치가 있다면 이 대회는 미켈롭 맥주와 캘리포니아피자키친이 넘쳤다. 아이들까지 즐기는 게 이 대회의 특징이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회장을 찾으면 일찍 경기를 마친 PGA투어 선수가 시간을 내 드라이빙 레인지에서 무료 골프 클리닉을 해주었다. 선수에게서 골프 레슨을 받은 어린이들이 커서 골프라는 경기와 대회에 참관하리란 건 자명해 보였다. 물론 그런 역사와 전통이 오늘날 제네시스오픈을 있게 했다. 역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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