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박노승의 골프 타임리프] 보비 존스의 말년
이미지중앙

전성기 보비 존스의 스윙 모습.


지난 1월 24일 이 코너를 통해 ‘역사상 단 한 명의 골프천재, 보비 존스’라는 내용을 전했다. ‘골프의 성인(聖人)’으로 불리는 익히 잘 알려진 레전드를 소개했는데도 많은 분들이 관심을 표했다. 그리고 보비 존스가 은퇴 후 어떤 삶을 살았냐는 질문도 받았다. 이에 그 내용을 소개한다.

1902년에 태어나 1930년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고 깜짝 은퇴를 선언한 28세의 보비 존스는 워너 브라더스와 계약하여 10분짜리 골프레슨 필름 12개를 제작했다. 그런데 이 필름은 미국 전역의 6,000개 영화관에서 상영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은퇴 후 첫 해 존스의 수입은 30만 달러가 넘었는데, 당시 상금왕이었던 진 사라센의 수입은 2만 5,000 달러에 불과했다. 그 이후 한해 상금이 30만 달러를 넘었던 선수는 40년 후 잭 니클라우스가 처음이었다.

존스는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을 건설했고, 1934년 제1회 마스터스 대회를 개최했다. 그런데 지역 유지였고,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은퇴 후에도 변호사 생활을 한 존스의 말년은 예상보다 불행했다.

불치의 병

가끔 등 쪽에 큰 통증이 있었던 존스는 1948년 마지막으로 18홀을 플레이한 후 더 이상 골프를 치지 못했다. 척수공동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는데 서서히 신경이 마비되는 불치의 병이었다.

이와 관련된 일화도 있다. 1950년 어린 시절 골프친구였던, 동네 누나 알렉사 스터링이 20년 만에 애틀란타를 방문했는데 존스가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멋진 존스가 마중을 나온다고 기대에 찼던 알렉사는 존스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창백한 얼굴에 양손에 지팡이를 짚었고 무릎에는 보행 보조기구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렉사는 울음을 참기 어려웠는데 존스는 품위를 잃지 않고 그녀를 환영하며 말했다. “골프에서 볼이 놓여진 대로 치듯이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결국 존스는 글씨도 못 쓰게 되어 테니스 공에 펜을 꼿아서 겨우 서명을 할 정도였다.

이미지중앙

골프 역사 상 유일한 천재로 평가받는 보비 존스는 불치의 병으로 말년에 불행했다.


생애 최고의 순간

1958년 스코트랜드의 세인트 앤드루스 시에서 보비 존스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는 연락이 왔다. 이는 1759년 벤자민 프랭클린에게 명예 시민증을 준 이래 처음이었다. 영국 사람들은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코스의 우승을 포함해 디 오픈에서 세 번이나 우승했던 존스를 영국의 아들처럼 사랑했다. 존스는 이미 휠체어를 타는 상태였지만 명예시민증 수여식에 참가하기 위해 스코트랜드로 갔다.

시민증 수여식은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의 강당에서 열렸다. 존스는 세인트 앤드루스의 토끼를 잡을 수 있고, 올드 코스에서 디봇을 내면서 골프를 쳐도 되며, 18번 홀 옆에 빨래를 널어도 되는 권리를 인정받았다. 연설 차례가 된 존스는 휠체어에서 일어나 바로 옆에 있는 연단으로 사력을 다해서 움직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휠체어에 앉아서 연설을 하도록 준비되었지만 일어나서 연단으로 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세인트 앤드루스의 시민들과의 우정을 잊지 않겠다는 연설을 마쳤다.

퇴장하는 존스를 위해 무대 아래에는 골프 카트가 들어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존스가 탄 골프카트가 서서히 움직이는데 1,700명의 관중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이제 존스를 마지막으로 본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한 관중이 “그대 다시 돌아 올꺼죠?”라는 제목의 스코트랜드 민요를 부르기 시작했고 다른 관중들 모두 눈물을 흘리며 따라 불렀다. 존스가 떠난 후 10분 동안 사람들은 퇴장을 못하고 그를 생각했다. 그 날은 존스 생애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가슴 아픈 순간

그러나 존스에게는 평생 가장 치욕적이고 비극적인 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스터스 대회의 시상식에는 언제나 보비 존스가 참석해 챔피언과 악수 하며 축하해주었는데, 1968년 마스터스 대회에서 CBS방송사가 존스의 모습을 생중계로 내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존스의 모습이 너무 비참해 방송에 내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존스는 마스터스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존스는 술과 담배의 양을 늘려가면서 건강이 점점 더 나빠져 갔다.

이미지중앙

보비 존스의 묘비.


끝까지 겸손했던 존스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 클럽에서는 존스의 동상을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존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또 존스를 영원한 회장으로 추대하자는 의견도 당사자가 반대했다.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클럽이 영원하면 되는 것이지 꼭 자기의 이름을 회장으로 남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1971년 존스가 세상을 떠난 후 회원들이 영원한 회장으로 추대해서 현재까지 공식 회장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마스터스 대회의 입장권에는 방문을 환영하는 인사말이 존스의 이름으로 전달된다.

존스의 장례식은 가족장으로 조용히 치러졌고, 공동묘지에 묻힌 존스의 작은 비석에는 이름, 출생일과 사망일 이외에 아무 내용도 없다. 비석마저 겸손한 것이다. 다만 그를 잊지 않고 찾아가는 팬들이 놓고 간 골프공들만이 그가 골퍼였음을 말해준다.

* 박노승 씨는 골프대디였고 미국 PGA 클래스A의 어프렌티스 과정을 거쳤다. 2015년 R&A가 주관한 룰 테스트 레벨 3에 합격한 국제 심판으로서 현재 대한골프협회(KGA)의 경기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건국대 대학원의 골프산업학과에서 골프역사와 룰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위대한 골퍼들의 스토리를 정리한 저서 “더멀리 더 가까이” (2013), “더 골퍼” (2016)를 발간한 골프역사가이기도 하다.
sports@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
          연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