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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로 갈라진 시골 마을 - 이준석의 킥 더 무비<승부>
사육제 축구로 대표되는 중세 축구

2012 런던 올림픽은 많은 축구팬들에게 기억될 대회입니다. 바로 한국의 올림픽 축구 대표팀이 동메달을 획득했기 때문이지요. 축구 종가 영국을 8강에서 이기고, 동메달 결정전에서 승승장구하던 일본팀을 2:0으로 격침한 장면은 두고두고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영국은 근대 축구의 종주국입니다. ‘근대 축구’라고 하는 이유는 ‘축구’와 비슷한 운동들은 오래 전부터 전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FIFA는 근대 축구가 아닌 원시적 형태의 축구까지 포함한 종주국은 중국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도 공을 발로 다루는 경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남미에서는 축구와 비슷한 경기를 한 뒤에 승리자의 심장을 신에게 바치는 의식도 있었다고 하네요.

영국에서 근대 축구가 제 모습을 갖추기 이전만 해도 축구는 상당히 난폭한 경기였다고 합니다. 오늘날처럼 공을 손 이외의 부분으로 다루어 상대편 골대에 넣는 경기가 아니었다는 거죠.

근대 이전의 축구는 마을 사람들이 두 편으로 갈리거나 혹은 두 마을 사람들이 팀을 이루어서 하나의 공을 두고 난투극을 벌이는 형태에 가까웠습니다. 당시에는 골대도 없었기 때문에 조잡하게 만들어진 공을 상대방 진영의 어떤 장소(교회나 물레방앗간 등)에 가져가면 득점하는 것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그러니 경기장 규격도 없었겠죠. 오늘날에는 가로 105미터, 세로 68미터로 축구장의 크기가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중세에는 두 마을 사이의 넓은 평야와 산악, 심지어 하천까지도 경기장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네요.

경기 형태도 오늘날처럼 세련된 패스나 헤딩, 혹은 전술이 있는 것이 아니었죠. 마치 초등학생들이 공 하나를 두고 운동장에서 떼로 몰려다니며 빼앗기 놀이를 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두 마을의 사람들이 일제히 공 하나를 빼앗기 위해 뭉쳐서 난장판을 만들었죠. 이렇게 사람들이 떼로 뭉쳐 있는 상태에서는 난폭한 걷어차기나 가격(加擊)은 물론이고 심지어 칼로 상대를 찌르는 일까지 비일비재했다고 하네요. 중세의 축구는 경기가 끝난 뒤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는 난폭한 전투에 가까웠고, 이로 인한 재판이나 금지령도 빈번했다고 합니다. 축구(football)라는 이름 자체도 공을 발로 차서 붙은 게 아니라 말을 타지 않고 걸어 다니는 수많은 대중들이 공 하나를 두고 서로 몸을 부대끼며 싸운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이런 형태의 중세 축구를 ‘군중 축구(mob football)’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사실 오늘날 축구(football)이라고 불리는 경기 중에는 꼭 발만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축구와 뿌리가 같은 미식축구(American football), 럭비(Rugby football), 호주식 럭비(Austrailian rules rugby), 아일랜드의 게일릭 풋볼(Gaelic football) 모두 손으로 공을 잡는 것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기들은 과거 상대방 마을로 공을 가져가며 몸싸움을 벌였던 중세 축구의 원형을 비교적 많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지요.

꼭 럭비나 미식축구가 아니라도 이런 중세 축구 혹은 군중 축구의 원형이 오늘날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 있습니다. 잉글랜드의 애쉬본(Ashbourne)이라는 마을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왕립 사육제 축구(Royal Shrovetide Football)’이라는 행사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서양의 축제인 사육제 기간에 펼쳐지는 이 축구는 오늘날의 축구와 판이하게 다릅니다. 마을을 가르는 강을 기준으로 남북에 사는 주민들이 편을 갈라 공 하나를 가지고 5킬로미터 떨어진 상대편 골대를 향해 돌격합니다. 규칙은 없고, 상대를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고 하니 얼마나 거친 경기일지 짐작이 가지요. 럭비처럼 공을 품에 안고 전진하는 사람에게는 수많은 태클과 몸싸움이 들어옵니다. 이런 몸싸움을 피해 아예 하천에서 공을 들고 수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공을 가지고 몰래 술집에 들어가서 맥주 한 잔을 하기도 한다고 하네요. 이런 식으로 상대방 진영의 돌기둥에 달려 있는 원판에 공을 세 번 두드리면 득점으로 인정됩니다.

이런 사육제 축구와 함께 중세 축구의 유산으로 불릴 만한 것은 또 있습니다. 바로 지역 더비(local derby), 혹은 그냥 더비라고 불리는 경기이지요. 한 마을 혹은 도시를 같이 연고로 하는 두 팀의 경기나 다른 도시를 연고로 하더라도 앙숙 관계에 있는 두 팀이 맞붙는 경기를 더비라고 합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중세의 축구는 당연히 한 마을 안의 주민들끼리, 혹은 이웃 마을끼리 경기가 펼쳐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전통이 오늘날 축구 더비의 모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지요.

비록 중세 축구나 사육제 축구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영국의 한적한 마을을 배경으로 오래 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더비를 다룬 영화가 마침 있어 흥미롭습니다. 1999년 개봉한 <승부(The match)>라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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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승부>의 포스터.

100년을 이어온 지역 더비


영화는 스코틀랜드의 어느 고산지대의 마을인 인버둔(Inverdoune)에서 펼쳐집니다. 인버둔에는 100년 전부터 이어지는 축구 경기가 있습니다. 바로 지역을 대표하는 두 음식점 간의 대결로,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전통적인 펍인 베니의 술집(Benny’s Bar)과 세련된 레스토랑인 비스트로(Le Bistro) 간의 경기이지요.

100년 전 약속에 따르면, 100년 후의 경기에서 승리하는 팀이 패배한 식당을 가지기로 되어 있습니다. 잘난 척 하기 좋아하는 비스트로의 주인인 거스(George Gus)는 준프로급의 선수들로 팀을 꾸려 이미 베니의 술집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률을 자랑하고 있죠.

하지만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희로애락이 녹아 있는 베니의 술집을 응원하고 있습니다. 울리(Wullie Smith)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을에서 우유를 배달하는 청년인 울리는 어렸을 적 사고로 동생을 잃은 뒤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짝사랑의 대상이 있습니다. 대도시에서 대학을 다니는 로즈마리(Rosemary Bailey)가 바로 그 대상이지요.

식당의 운영권을 건 경기 날짜는 계속 다가옵니다. 정예 멤버로 계속 훈련에 열중하는 비스트로와 달리, 베니의 술집에서는 선수단 구성조차 못하는 혼돈이 펼쳐집니다. 모두들 울리가 축구단의 리더를 맡아주길 바라지만 어렸을 적 상처와 곧 떠날 로즈마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울리는 방황하죠.

그러던 중 울리는 100년 전 베니의 술집 선수들이 입었던 낡은 유니폼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비밀이 있음을 알게 되죠. 과연 베니에겐 어떤 과거가 있었던 걸까요? 그리고 베니의 술집은 비스트로 팀을 이기고 술집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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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30일에 벌어진 엘클라시코 더비. 세르히오 라모스가 카를레스 푸욜의 얼굴을 가격하고 있다. 둘은 스페인 국가대표 동료이기도 하나 엘클라시코는 그 모든 것을 적으로 만든다.

더비의 탄생


영화에 나오는 사례는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도 축구의 본고장인 영국에는 수많은 더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시티 간의 맨체스터 더비, 리버풀과 에버튼 간의 머지사이드(Merseyside) 더비, 뉴캐슬과 선더랜드 간의 타인 위어(Tyne?Wear) 더비 등의 유명 더비 뿐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마을의 더비들도 많이 있다고 하네요.

그렇다면 왜 이런 라이벌전을 더비라고 부를까요?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축구뿐만 아니라 더비라는 말이 쓰이는 분야가 경마입니다. 혹시 일본 게임 ‘더비 스타리온(Derby Stallion)’을 들어보신 적이 있나요? 경마에서 더비는 경주를 의미합니다. 대개는 특별한 상금이 걸린 레이스를 의미하지요. 경마에 더비가 붙은 것은 1780년 잉글랜드에서 더비 백작(Earl of Derby)에 의해 창시된 경주 이후입니다.

하지만 축구 더비의 기원을 경마에서 찾는 건 축구팬으로선 자존심이 좀 상하는 일이겠죠? 어떤 사람들은 잉글랜드의 더비라는 도시에서 펼쳐졌던 난폭한 사육제 축구에서 더비라는 용어가 유래되었다고 주장합니다. 1800년대 더비에서 펼쳐진 사육제 축구는 올세인츠 교구와 성 피터 교구가 북쪽의 방앗간과 남쪽의 교수대를 골대 삼아 펼치는 경기였습니다. 경기가 끝난 이후에는 뼈가 부러지고,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사람들이 즐비했다고 합니다. 1829년 이 경기를 목격했던 프랑스인은 “이게 잉글랜드의 ‘놀이’라면, 대체 ‘싸움’은 어떤 정도란 말인가?” 라고 경악을 할 정도였으니까요.

사실 오늘날에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더비라 불리는 경기들은 만만치 않은 후유증을 남기곤 합니다. 치안이 좋지 않은 지역에서는 살인사건까지 일어난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더비에는 폭력과 과열이라는 안 좋은 면이 있는 반면에, 스포츠의 열기를 끌어올리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장점도 있습니다.

영화 <승부>에서도 이름 없는 시골 마을이 두 식당 간의 더비 경기로 왁자지껄 축제를 즐기는 모습이 나옵니다. 게다가 어디든 푸른 잔디가 무성하게 조성되어 있는 영국의 기후 조건이 그대로 영상에 등장합니다.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는 산업화 이전의 영국 초원이 나옵니다. 저렇게 잔디가 많으니 축구나 골프 같은 스포츠가 발달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처럼 더비는 영국의 독특한 자연 환경을 바탕으로 마을 간에 공놀이를 즐기는 문화적 전통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인류의 문화유산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치열한 더비 라이벌 전을 즐기면서도 한 번씩 이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요?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니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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