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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구장은 우리 집 - 이준석의 킥 더 무비 <킥 오프>

나라가 없는 가장 큰 민족, 쿠르드족

중동에는 작지만 부자인 나라들이 꽤 많습니다.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등등. 게다가 카타르는 경기도만한 국토임에도 오일 달러를 앞세워 2022년 월드컵까지 유치한 상태네요. 반면 인구수가 많음에도 자신들의 나라를 갖지 못한 민족이 있습니다. 바로 쿠르드족(Kurd 族)입니다.

쿠르드족은 인구가 3,700만 명에 달합니다. 우리나라보다 조금 적은 수준이죠.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터키, 이란, 이라크 국경이 맞닿은 지역에 살고 있지만 이들과 갈등만 하고 있을 뿐 정식으로 자신만의 국가를 세우진 못했습니다.

특히 이라크와는 악연이 큽니다.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걸프전 당시 쿠르드족이 연합국의 편을 들었다며 화학탄을 이용한 공격을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이후, 쿠르드족은 자치권을 많이 보장받았지만 아직 본인들의 나라를 세우고 있진 못하네요.

하지만 쿠르드족이 단순히 나라 없이 설움만 받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군 전쟁을 그린 영화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에는 잔인한 유럽의 십자군에 맞서는 이슬람의 장군이 나옵니다. 바로 살라딘입니다. 십자군이 이슬람교도를 상대로 온갖 악행을 자행했지만, 살라딘은 오히려 관용의 정신으로 포로에게 공정한 대우를 해주고 패배한 유럽인들의 안전한 퇴각을 보장해 주면서 그 인품을 드러냅니다. 이슬람의 영웅으로 추앙 받고, 그들의 적인 유럽인으로부터도 높이 평가 받는 살라딘이 쿠르드족이라고 하네요.

그러나 오늘날의 쿠르드족들은 나라 없이 터키에서 이란으로, 이란에서 이라크로, 이라크에서 터키로 떠돌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아픔을 그린 영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네요. 축구는 진정 세계인들의 공통 언어인 것 같습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이 스포츠가 각 민족의 애환을 드러내고 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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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장을 집 삼아 사는 사람들

이라크의 어느 사막 도시에 버려진 축구장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집 없는 쿠르드족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경기장 라커룸에 들어앉거나 경기장 구석에 집을 짓고 삽니다. 아이들은 경기장의 관중석을 놀이터 삼아 뛰어다닙니다. 어른들은 잔디는커녕 흙바람만 날리는 그라운드에서 양과 말을 키웁니다. 물도 없고 석유도 없습니다. 어쩌다 물을 파는 급수차가 오면 사람들은 소총을 갖고 물을 사러 갑니다. 어느 집 아들이 시장에 갔다가 폭탄 테러로 죽었다는 소문도 돕니다. 가끔씩 이라크를 점령한 미군들이 대형 험비(humvee)를 타고 쳐들어와 테러범들을 수색합니다.

이런 살벌한 환경에 사는 두 형제가 있습니다. 아소와 디야르가 그들이지요. 축구를 좋아하는 디야르는 평상시에 지단(Zinedine Zidane)의 이름이 새겨진 유벤투스 유니폼을 입고 다닙니다. 하지만 지뢰밭에서 축구를 하다가 한 쪽 다리를 잃은 상태이지요. 그런 디야르를 위로하기 위해 형 아소는 디야르에게 축구 경기를 보여줍니다. 어렵게 프로젝터를 가져온 아소는 축구 골대에 천막으로 스크린을 만듭니다. 그리고 디야르를 포함한 사람들에게
2007 아시안컵 결승을 보여줍니다. 이 경기에서 쿠르드족 선수들이 포함된 이라크 대표팀은 사우디아라비아를 1:0으로 꺾고 아시안컵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다리를 잃은 디야르는 좀처럼 우울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이에 아소는 아예 직접 축구 경기를 개최하기로 합니다. 아랍인, 쿠르드인 등 여러 민족의 선수들을 초청해서 경기를 개최합니다. 각종 판잣집과 방목 중인 가축들 천지이던 낡은 경기장이 어느새 국제 경기장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온갖 헬리콥터가 날아다니고 폭탄 테러가 계속됩니다. 결국, 축구공을 구하기 위해 경기장 밖으로 나갔던 아소는 폭탄테러로 죽습니다. 그리고 디야르 역시 절망감을 못 이기고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하면서 이 영화는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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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고통 받는 쿠르드인,입대의 구분에는 남녀가 없다.

외침으로 나라와 평화를 갖지 못한 쿠르드인들


이 영화에서 집을 잃은 쿠르드 인들이 축구장에서 나름의 삶을 영유하는 모습은 참으로 상징적입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라크 인들이 와서 경기장을 떠나라고 협박하지만 그들은 갈 곳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살기 시작한 축구장. 하지만 폭탄이 터지고 헬기가 날아다니는 밖의 도시와 달리 축구장 안은 너무나 평안해 보입니다. 아이들은 뛰놀고, 여인들은 축구 골대에 염소를 묶습니다. 젊은이들은 공을 차고, TV로 축구를 보고, 책을 읽으며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경기장 밖으로 나가면 그들은 물을 얻기 위해 서로 총을 겨누어야 합니다. 또 각종 지뢰밭과 폭탄을 두른 테러범들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들에겐 축구장이 집이자 ‘나라’인 것이죠. 온갖 무력과 협박으로부터 안전한 나라를 갖는 것. 쿠르드족이 꿈꾸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축구장’은 바로 그 상징입니다. 더 나은 곳을 찾아 축구장을 떠난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고, 축구공을 구하러 축구장을 나간 주인공이 테러에 희생되는 모습은 쿠르드족 독립국가에 대한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지켜줄 나라가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죠.

축구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가 있는 종목입니다. 또한 ‘월드컵’과 ‘A매치’로 대표되듯 ‘애국심’ 혹은 ‘국가주의’가 많이 개입되어 있는 스포츠이죠. 그래서일까요? 이 영화가 쿠르드 족의 독립 국가를 염원하는 소재로 축구를 택한 것은 꽤나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황폐하지만 그들의 집인 축구장에서 다른 민족과 쿠르드 족이 국제 경기를 펼치는 장면을 보며 오늘날 많은 쿠르드 족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덧붙여: 이 영화에 등장하는 2007 아시안컵은 말씀드린 대로 이라크의 우승으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게는 꽤나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준결승까지 진출한 우리 대표팀은 이라크 대표팀과의 승부차기에서 석연치 않은 패배를 당했습니다. 당시 이라크 팀은 소극적인 경기 운영으로 우리나라와 승부차기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중동계 심판은 우리나라 선수들이 승부차기를 준비할 때마다 공의 위치를 트집 잡으며 선수들의 타이밍을 방해하는 듯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사실 중동으로 대표되는 서아시아 축구 문화에 대한 불만의 소리는 꾸준히 있어왔습니다. 소위 ‘침대 축구’로 불리는 시간 끌기, 그리고 심판들의 자질 문제 등등. 우리 축구팬들이 이 영화에 나오는 이라크의 우승 장면에 선뜻 공감할 수 없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닐까요?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니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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