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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라운드의 이카로스 - 이준석의 킥 더 무비<축구의 신: 마라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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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마라도나, 아르헨티나


이제는 우리나라도 웬만한 국제적인 스포츠 대회는 다 개최해 본 것 같습니다. 올림픽, 월드컵, F1 그랑프리, 세계 육상 선수권까지. 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개최하는 것에 대한 논란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국가대표 스포츠 경기를 좋아하는 우리 국민의 특성상 돈으로 살 수 없는 많은 감동과 추억을 선물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스포츠 대회는 때로 독재 정권의 선전 도구로 악용되기도 했습니다. 나치 치하에서 열린 1936년 베를린 올림픽과 파시스트 당 치하에서 열렸던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이 그렇습니다.

독재 정권이 대형 스포츠 이벤트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시키려고 했던 시도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일 것입니다. 당시 비델라(Jorge Rafael Videla Redondo) 장군을 위시한 아르헨티나 군부는 정권을 잡은 후, 국민들의 불만을 무마하고 자신들의 정권을 선전하는 도구로 월드컵을 철저히 이용했습니다. 월드컵 기간 수많은 정치범들이 고문 받고 살해되었습니다. 당시 정치범들은 하늘에 떠 있는 수송기에서 강제로 밀려 바다로 떨어졌다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지요.

게다가 아르헨티나 팀을 챔피언으로 만들기 위해 상대방인 페루 팀을 매수했다는 논란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 권력은 오래 가지 않는다고 했지요. 결국 아르헨티나 군부는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뒤 정권의 종말을 맞습니다. 85세의 노인인 비델라 장군은 아직도 감옥에서 종신형을 살고 있다고 하네요. 그러나 그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독재 시절 실종된 사람들의 어머니들은 ‘5월 광장 어머니회’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하네요.

이처럼 아르헨티나는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 슬픈 역사의 한 장면에 축구가 자리하고 있고요. 그렇다고 해서 아르헨티나 축구가 이런 슬프고 비참한 역사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아르헨티나 축구’ 하면 1978년의 월드컵보다 오히려 이 사람을 떠올리지요. 바로 ‘마라도나(Diego Armando Maradona)’입니다.

마라도나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아르헨티나 축구의 슈퍼스타입니다. 지금도 브라질의 펠레와 마라도나 중 누가 세계 최고의 축구 스타인지를 가리는 논란이 축구 잡지를 뒤덮고 있습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우승을 이끌었고, 이탈리아에서는 북부 도시에 밀려 소외되었던 나폴리 축구팀을 이끌고 유럽을 휘저었습니다. 게다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감독이 되어 아르헨티나 대표팀을 직접 이끌기도 했지요. 아예 마라도나를 신으로 모시는 ‘마라도나교’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마라도나는 어두운 역사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마라도나는 도핑 테스트에서 마약 성분이 검출되어 대회에서 축출되었습니다. 이후로 마약 중독에서 허우적대기도 했지요. 월드컵에서 손으로 골을 넣고 태연자약하게 “그건 신의 손이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탱고 음악처럼 화려한 반면에 어둡고 슬프기도 한 그의 삶은 마치 아르헨티나 축구와 아르헨티나의 역사를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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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문제와 자신의 방황에 대한 솔직한 심정


감독은 축구스타인 마라도나를 따라다니면서 그가 어떤 일상생활을 겪고,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추적합니다. 축구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지만 오히려 축구 외적인 이야기들이 더 많습니다.

마라도나의 솔직한 이야기들 중에 역시나 가장 관심 가는 건 마약으로 황폐화된 시절이죠.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도핑 테스트에서 마라도나는 약물복용으로 판정되어 추방되었습니다. 사실 본인은 그때는 금지 약물을 복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죠. 하지만 마라도나가 다른 곳에서 마약 문제, 총기 문제 등으로 말썽을 일으킨 것이 사실이고 나중에는 그 후유증으로 병원 신세까지 지게 되었습니다.

마라도나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고 가족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그의 문란한 사생활로 인하여 어린 두 딸이 커가는 과정을 볼 수 없었고, 이는 인생에서 큰 보물을 잃은 것이라며 애석해 하죠.

하지만 그의 친정팀인 보카 주니어스(Boca Juniors)를 방문한 마라도나는 환호하는 관중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단언컨대 저는 축구 자체를 모독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약으로 본인의 인생을 탕진했지만, 적어도 축구를 대하는 그의 태도만큼은 진지했다고 외치는 마라도나. 물론 미국 월드컵 당시의 약물 복용은 축구에 대한 모독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오히려 그 실패를 극복하는 과정이 더 중요한 것 아닐까요? 나중에는 감독이 되어 월드컵 무대를 다시 밝기도 했던 왕년의 슈퍼스타. 그런 의미에서 마라도나는 철없던 그라운드의 악동시절을 넘어 성년기로 접어든 멋진 축구 선배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리스트이며 현재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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