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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민의 믹스트존] 대한축구협회가 만든 '독이 든 성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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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대표팀의 차기 감독 선정을 위해 지난 8월 31일 출국한 이용수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

대한축구협회가 차기 대표팀 감독 선임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을 준비하며 조광래, 최강희, 그리고 홍명보 감독을 차례로 내세웠지만 부진한 성적과 각종 사건 사고로 국민적 비난을 초래했고, 마지못해 2015 AFC 아시안컵과 2018 러시아 월드컵을 목표로 감독 선임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최우선 후보로 거론되었던 베르트 판 마르베이크 감독 선임이 결렬되면서 축구협회의 감독 선임이 표류하고 있다. 왜 이렇게 차기 대표팀 감독 선임이 어려워진 것일까?

축구협회는 ‘인맥 축구’ 논란을 종식하기 위해 다음 8가지 요건을 세우고 이에 부합하는 인물들을 후보로 골랐다.

1. 대륙선수권 지휘 경험
2. 월드컵 예선 경험
3. 월드컵 본선 16강 이상 경험
4. 클럽 지도 경험
5. 유소년 및 지도자 교육 참여
6. 66세 미만
7. 영어 구사
8. 현재 바로 계약 가능

각 요건을 따로 따져보면 합리적인 요건인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요건에 부합하는 감독을 찾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이 문제다. 심지어 판 마르베이크 감독과의 협상이 결렬되면서 '한국축구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라는 9번째 요건까지 비공식적으로 추가되었다. 애초에 다양한 지도 경험을 요구한 자체가 빠른 시간 내에 한국 선수들을 파악하고 팀을 꾸리기 위함이다. 여기에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개념이 모호한 ‘열정과 헌신’을 잣대로 추가한 것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하다.

어쨌든 ‘이 요건들을 모두 갖춘 지도자가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존재하는가?’라는 의구심이 들 지경에 이르렀다.

월드컵 16강 감독들에게도 어려운 요건
과연 축구협회의 요건들이 합리적일까? 브라질 월드컵 16강 진출 팀들의 감독들을 살펴보면, 대회 시작 이전 기준으로 16명의 감독 중 오직 6명의 감독만이 1, 2, 3, 4번의 요건을 충족한다.

또 절반에 가까운 7명의 감독은 브라질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국가대표팀을 맡았다. 한마디로 축구협회가 내건 요건들이 실제로 한국 대표팀의 월드컵 성적과 관계가 있을지는 미지수인 것이다.

결국 축구협회의 모든 요건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한국 대표팀을 빠르게 파악하고 다음 월드컵 때까지 장기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한국 축구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 있는 경험 많은 지도자'이다. 그렇다면 국내 지도자들이 이 수식어에 더욱 어울릴 것이다.

그런데 조광래, 최강희, 홍명보는 물론 과거 국내 지도자로 숱하게 홍역을 치른 축구협회가 국내 지도자 카드를 꺼내들 가능성은 많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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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월드컵 3패에도 불구하고 지도력을 인정받은 호주 대표팀의 엔제 포스테코글루 감독. 그는 그리스 출신으로 호주 국적을 가지고 있다.

호주 모델
이런 상황에서 참고할 만한 예가 있다면 바다 건너 호주 축구협회의 사례다. 호주는 2006 남아공 월드컵에서 거스 히딩크, 2010 독일 월드컵에서 핌 베어백에게 지휘봉을 맡기는 등 지난 10년 간 한국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그런데 2013년 대표팀이 친선경기에서 브라질과 프랑스에게 0-6으로 거푸 참패를 당하자 '외국인 감독은 떠나면 그만이기 때문에 내국인 감독이 필요하다'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국내 리그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내국인 감독 앤제 포스테코글루를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하여 월드컵에 대비했다.

월드컵 본선을 겨우 8개월 앞둔 상황에서 국제 무대 경험이 전무하다시피한 내국인 감독을 선임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으나, 호주 축구협회는 포스테코글루 감독과 5년 계약을 체결하면서 2018 월드컵을 준비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브라질 월드컵에서 호주 대표팀은 3패에 그쳤지만 신예 선수들이 대거 출전하여 강팀들을 상대로 선전하며 국내외에서 호평을 받았다.

호주와는 달리 현재 대한축구협회는 뚜렷한 철학에 입각하여 감독 선임에 나선 것이 아니라 여론의 눈치를 보고 있다. 축구협회가 제시한 감독 후보의 8가지 요건도 추후 비난이 가능한 조건들을 미리 걸러내는 장치로 해석된다. 즉 적합한 인물의 조건이라기보다는 한국 대표팀 감독이라는 독이 든 성배에 담긴 독을 얼마나 견딜 수 있냐는 조건인 것이다.

독이든 성배를 나눠 마시자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 자리를 '독이 든 성배'로 만든 장본인은 바로 축구협회다. 조광래, 최강희, 홍명보 감독이 여론의 뭇매를 맞을 때도 축구협회는 본인들이 섭외한 감독을 옹호하기보다는 불똥이 협회로 튀지 않기만을 바라는 눈치였다. 이번에도 인맥 축구 논란이 일자, 무조건 외국인 감독을 선임한다는 느낌이 강하다.

어중간한 외국인 감독을 선임하느니 앞으로 한국 축구계에서 남아 스타 감독으로 활동할 수 있는 국내 지도자를 선임하는 것은 어떨까. 한국 축구를 짊어질 유소년 선수들을 꾸준히 육성하는 사업을 벌이는 것처럼 국내 감독도 육성해야 한다. 대신 확실하게 한국축구의 비전을 공유하는 감독을 선임하고 나서 여론을 설득해야 한다. 다음 월드컵이 열리는 2018년까지 4년이나 남았기에 시간은 충분하다.

한국 축구에 대한 열정과 헌신. 참 좋은 말이다. 축구칼럼리스트 이승민 kingkenny7@gmail.com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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