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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광양회? 정신승리?? - 이준석의 킥 더 무비 <소림축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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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의 명소 동방명주 타워

빈부 격차의 그늘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곳은 상하이입니다. 거대한 마천루들이 들어서 있고, 저 멀리로는 상하이 푸동지구의 상징인 동방명주 TV탑이 보입니다. 과거 중국의 이미지와 다르게 세련되고 도시적인 사람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죠. 하지만 정작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이 화려한 도시의 최빈곤층들입니다. 물론 코미디 장르이다 보니 빈곤에 대한 심각한 경고보다는 블랙유머로 중국 빈곤층들의 삶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중국 경제 성장의 그늘에 가린 빈곤층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함은 분명해 보입니다.

주성치는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빈부격차에 대한 많은 비판하고 있습니다. 코미디이고 유쾌한 영화들이지만 그의 영화 주인공들이 한결같이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장강7호>에는 건설현장에서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고 일하는 아버지가 나옵니다. <쿵푸허슬> 역시 빈민가에 사는 무림 고수들의 이야기입니다.

소림축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 아성은 쓰레기를 주우며 살아갑니다. 한때 소림사에서 무예를 다졌던 동료들은 나이트클럽에서, 대형마트에서 일용직으로 살아가고 있죠. 아매는 성이 상품화된 현대 사회에서 추한 외모를 가지고 만두나 만들며 살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처럼 주성치 감독은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블랙 유머를 통해 승화시킴으로써 굴기로 대표되는 경제 성장의 뒤안길에서 희생자로 전락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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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대 외교정책 / 출처=야글미라님의 블로그

도광양회(韜光養晦)냐 정신승리냐?

빈부격차 말고도 <소림축구>는 오늘의 중국이 가진 딜레마를 느끼게 합니다. 쿵푸를 접목한 축구를 통해 퇴물 취급 받던 감독은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또 보잘 것 없는 삶을 살던 주인공들은 일거에 영웅이 됩니다. 이는 근대화에 실패하고 공산주의 체제로 들어가 국제사회의 주인공 자리를 잠시 내준 중국이, 경제 발전과 함께 화려하게 부활하는 요즘의 상황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중국 역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앞서 말했던 빈부격차 뿐만이 아닙니다. 최근의 신장 자치구 테러에서도 보듯 소수 민족의 갈등 문제가 있습니다. 또 높아지는 민주화 요구와 뿌리 깊은 부정부패에 대해 중국 지도부는 많은 고심을 하고 있죠. 강대국 및 주변국과의 갈등도 커지고 있습니다.

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우수한 외국인 선수를 영입한 광저우가 결국 아시아 클럽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중국 국가대표는 여전히 월드컵 본선에 좌절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외형적으로 중국 프로축구인 슈퍼리그는 크게 성장했지만, 그 이면에는 축구 도박 같은 부패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축구든 나라든 이제 세계를 향해 포효하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문제들이 중국의 앞길을 막고 있는 것이죠.

<소림축구>를 통해 우리는 중국의 이런 딜레마를 느낄 수 있습니다. 주변의 비웃음에도 뒷골목에서 쿵푸를 연마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1980년대 중국의 외교 정책으로 통했던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떠오르게 합니다. 도광양회는 빛을 숨기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힘을 기른다는 뜻입니다. 1980년대의 중국은 경제 개혁과 개방 정책을 활발히 취했지만, 강대국과 직접 겨루기에는 국력의 차이가 있었던 게 사실이죠. 그래서 국력이 어느 정도 오를 때까지는 조용히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했던 게 사실입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마침내 화려한 무술로 우승컵을 드는 장면은, 도광양회를 통해 성장한 중국이 오늘날 달성한 번영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축구 그라운드에 회오리바람이 불고, 불꽃이 튀는 등 무협 소설에서나 등장하는 쿵푸 대결이 펼쳐지는 모습은 다소 비현실적입니다. 중국 문화 특유의 과장으로도 생각되지만, 저는 다른 관점으로도 바라보게 됩니다. 올림픽에서도 우승을 하는 중국이 이상하리만큼 힘을 못 쓰는 남자 축구. 그 축구를 쿵푸를 통해 정복한다는 영화 줄거리가 혹시나 정신승리법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지요.

중국의 유명한 소설가인 루쉰[魯迅]의 작품 『아큐정전(阿Q正傳)』에는 ‘정신승리법’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아Q는 모욕을 당해도 저항할 줄 모르고, 홀로 공상 속에서 ‘정신적 승리’로 탈바꿈시키는 희한한 사고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루쉰은 외세의 침략에도 굴욕을 느끼지 못하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중국의 굴욕을 풍자한 것입니다.

사실 소림쿵푸는 예전부터 중국인들의 자존심과도 같았습니다. 이런 자부심 때문인지 때로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도 무술 영화를 통해 나타나곤 했습니다. 2011년 개봉한 <신소림사(Shaolin)>, 군벌이 난무하던 1900년대 초반, 서양 세력이 우수한 무기를 앞세워 소림사에 쳐들어옵니다. 하지만 소림사의 승려들은 맨몸으로 서양군대에 맞서면서 중국의 정신을 지키자고 외치죠. 일본군을 향해 날아차기를 하는 이소룡의 <정무문(精武門)>이 그랬고, 무술로 총알을 막아내는 주윤발의 <방탄승>이 또 그렇습니다. 무술로 총과 대포를 이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물론 영화적 상상력에 현실의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외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중국 전통 무술로 외세와 맞선다는 건 한편으로는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도 보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종의 정신승리법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받게 됩니다. 소림축구에서 이소룡의 복장을 한 골키퍼가 나오는 것을 그저 패러디로만 바라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직 중국 대표팀은 강팀이라 불리긴 힘듭니다. 그러나 중국 문화의 상징인 쿵푸가 접목된 강력한 소림축구팀을 보면서 중국인들은 여유로운 꿈을 꾸는지도 모릅니다. 도광양회의 자세로 언젠가는 중국이 세계 축구를 호령하는 날을 꿈꾸는 거죠. 그것이 현실화될지, 아니면 그저 정신승리 속의 공상으로 끝날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중국 축구는 더 이상 공한증에 시달리던 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 우리를 위협하는 수준까지 성장했다는 점입니다.

#글쓴이 이준석은 축구 칼럼리스트로, 비뇨기과 전문의이다. 이 글은 저자가 2013년 3월 펴낸 《킥 더 무비-축구가 영화를 만났을 때》를 재구성한 내용이다. 축구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한 감상평으로 축구팬들로부터 스포츠의 새로운 면을 일깨우는 수작으로 큰 호응을 받았다(네이버 오늘의 책 선정).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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