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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곳은 노동지옥] ①"가장 경멸하던 삶" 호소에도…카메라 뒤 여전한 스태프 잔혹사
“촬영 스케줄 자체가 신체적·정신적 폭력이다” 정당한 임금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잠잘 시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을 표현한 말이다. 고(故) 이한빛 PD가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노동 실태를 고발하고 스스로 세상을 등진 지 2년. 드라마 제작 현장에 여전히 만연한 병폐와 건강한 드라마 산업구조를 만들기 위한 변화의 움직임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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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Pixabay)




[헤럴드경제 스타&컬처팀=노윤정 기자] # A드라마에 스태프로 참여하고 있는 B씨는 서울 상암동에서 오전 7시 20분까지 모이라는 연락을 받았다. 정해진 장소에서 다른 스태프들을 만나 함께 경기도권의 촬영지로 이동하니 시계가 오전 9시를 가리킨다. 그때부터 시작된 촬영은 다음날 오전 5시 30분경 끝났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진 못했다. 동료 스태프들과 인근 숙박업소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오후 12시 40분 다시 모여 촬영장으로 향했다. 오후 1시경 시작한 촬영은 다시 날을 넘겨 오전 6시 30분가 되어서야 종료됐다.

최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제보 받은 한 스태프의 이야기를 토대로 재구성한 드라마 촬영 현장의 현주소다. 이날 B씨와 함께 촬영에 임한 스태프들은 일일 17~18시간 이상을 근무했다. 이날만 특별히 근무 시간이 길었던 것도 아니다. 드라마 촬영 기간 중에는 이와 비슷한 스케줄로 일주일에 4~5일을 촬영한다. 이 드라마 현장만의 문제일까? 다른 드라마 제작 현장은 다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지난 8일 첫 선을 보인 KBS2 드라마 ‘최고의 이혼’은 첫방송을 앞두고 근로기준법 위반 논란에 휩싸였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측이 제보를 받고 파악한 내용에 따르면 ‘최고의 이혼’ 스태프들은 하루 서너 시간 수면을 취하며 강도 높은 업무량을 이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촬영 도중 발생하는 이동시간을 근무시간에서 제외하는 방식으로 근무시간을 줄인 정황이 포착됐다. 이 외에도 최근 tvN 드라마 ‘아는 와이프’ ‘나인룸’, OCN 드라마 ‘보이스2’ ‘플레이어’ 등의 촬영장에서 장시간 노동이 강요되고 있다는 고발이 이어지고 있다.

사실 밤샘 촬영, 생방 촬영, 긴 대기 시간 등은 그동안 드라마 촬영장에서 당연시돼 왔던 것들이다. 드라마를 만들 때는 쪽잠을 자고 밤을 새가며 촬영을 이어가는 것이 관행처럼 여겨져 묵인돼왔다. '방송을 내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이 만연했고 이 업계에서 계속 일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버텨야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제대로 된 근무 여건이 조성돼 있지 않으니 크고 작은 사고가 비일비재하다. 워낙 사고가 많다 보니 웬만큼 큰 사고가 아니고서는 뉴스거리도 되지 못할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에 변화의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한 젊은 스태프의 비극이 계기가 됐다. 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조연출로 일하던 고 이한빛 PD가 작품 종영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고 이한빛 PD는 유서에서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내가 가장 경멸하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다”고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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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SBS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넷플릭스 '킹덤', tvN '화유기' 포스터)




이를 계기로 드라마 제작 현장의 노동 환경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노동자는 물론 업계 자체를 병들게 만드는 환경을 더 이상 묵인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고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긴 시간 굳어져 있던 관습은 쉽게 변하진 않았다. 스태프들은 여전히 카메라 뒤에서 혹사당하고 있다. 그 안에서 안타깝게 목숨을 잃거나 평생 안고 가야 할 신체 장애를 갖게 되는 일도 발생했다.

지난해 12월 tvN 드라마 ‘화유기’의 스태프가 세트장 천장에 샹들리에를 설치하는 작업을 하던 중 세트가 무너지며 바닥으로 떨어져 하반신 마비 증세를 보였고 지난 1월에는 넷플릭스가 제작 중인 드라마 ‘킹덤’의 미술 스태프 B씨가 대동맥류 파열로 뇌사판정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으나 끝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지난 8월 1일에는 SBS 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 촬영 현장에서 일하던 스태프 A씨가 자택에서 내인성 뇌출혈로 사망한 채 발견됐다. A씨는 폭염이 계속되던 7월 말, 사망 직전 5일간 야외에서 76시간에 달하는 노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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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추혜선 의원실)



■ "일일 근무 시간 기준이 24시간?" 불공정 계약 문제 심각


스태프들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살인적인 노동 환경을 가능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방송 제작사와 스태프 사이에 존재하는 불공정 계약이다. 상시 5명 이상의 노동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장이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지만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는 ‘관행’이라는 이름 하에 스태프들의 기본적인 권리들을 무시하는 행태가 빈번했다.

정의당 추혜선 의원실이 지난 7월 공개한 ‘방송프로그램(드라마) 용역계약서’에는 드라마 제작 스태프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나 있다. 해당 계약서 일부를 보면 세부 계약 조건에 을(스태프)의 근무 시간은 ‘24시간 기준’이라고 명시돼 있다. 근무 기간은 ‘촬영 종료일까지’다. 아예 계약 조항부터 스태프들의 초과 노동이 가능하도록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턴키 계약(Turn-key, 프로젝트 전체를 포괄하는 계약으로 출장비·인건비 등을 구분하지 않고 '용역비'로 일괄 계약) 방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해 식비, 장비 사용료, 서울 및 경기도 이외 지역으로의 출장비 등이 모두 용역비에 포함된 경우가 대다수다. 1일 8시간 노동 초과 금지(제50조 제2항), 근로 시간이 8시간인 경우 1시간 이상의 휴게시간 보장(제54조 제1항), 근무 조건을 구체적으로 명시(제17조 제1항) 등 근로기준법이 정하는 기본적인 요건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현재 대부분의 스태프들이 제작사와 도급계약(업무위탁계약) 혹은 개인사업자(프리랜서) 계약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 노동자가 사용자와 근로계약이 아닌 도급계약 등 특수고용관계를 맺게 되면 ‘사용종속관계’가 발생하지 않아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사업자 대 사업자의 계약이 되어 근로기준법 등 노동 관련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당연히 사용자 역시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처벌받는 경우가 거의 없다. 노동권의 사각지대인 드라마 제작 환경이 개선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다.

그나마 계약서를 쓰기라도 했다면 다행이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가 설문조사 전문업체 서던포스트에 의뢰해 방송스태프 291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26.8%가 최근 참여한 드라마 현장에서 계약서 없이 구두계약만으로 일을 해왔다. 지난해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국민의당 이상돈 의원이 확인한 ‘방송제작스태프 계약실태조사’ 보고서 역시 방송 스태프의 계약 형태 현황을 알 수 있는 지표인데, 당시 조사에 응한 방송 제작 스태프 2007명 중 76.2%에 해당하는 1529명이 서면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채 방송 제작에 참여하고 있던 것으로 파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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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합뉴스)



■ 노조 설립·법적 노동자 인정, 변화 위한 첫 발걸음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던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고 이한빛 PD의 유지를 잇기 위해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만들어진 이후부터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는 제작 스태프들의 제보를 받아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을 세간에 알리고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다. 더디고 아직 개선해야 할 저도 많지만 끊임없는 문제제기는 큰 변화를 가져올 의미 있는 전환점들을 만들고 있다.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스태프들의 부상, 사망 사고가 계속 발생하자 정부는 지난 7월 1일부터 시행된 근로기준법 개정안에서 ‘방송업’과 ‘영상·오디오 기록물 제작 및 배급업’을 노동시간 특례업종에서 삭제, 스태프들의 장시간 노동을 규제하기 시작했다. 또한 정부는 드라마 제작 스태프의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유의미한 기준을 제시했다. 고용노동부는 드라마제작환경개선TF 요청에 따라 지난 3월부터 반년 간 드라마 제작 현장을 특별근로감독했다. 그 결과 프리랜서 계약을 체결했더라도 업무 수행에 있어서 사실상 총감독의 지시를 받고 담당업무가 사전에 정해져 있다면 드라마 제작 스태프를 노동자로 봐야한다고 인정했다(조사 대상 스태프 177명 가운데 157명의 노동자성 인정). 그러면서 연출·촬영·제작 분야는 외주제작사가, 조명·장비·미술 등 기술 분야는 외주제작사로부터 도급을 받은 팀장 혹은 업체가 각각 사용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물론 기술 분야의 경우 방송사와 제작사가 져야 할 책임을 감독급 스태프에게 전가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스태프들이 법적 노동자로 인정받고 보호받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정부 정책과 발을 맞춰 같은 달 4일 1000여명의 방송 스태프 노동자들이 동참한 가운데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가 설립총회를 개최했다.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는 노동시간 단축과 턴키 계약 근절 및 노동시간과 적정 임금이 명기된 근로계약서 작성 등을 우선 과제로 삼고 방송 스태프들의 노동인권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을'인 스태프 측에 불공정한 조항이 가득한 계약서는 최우선 개선 대상이다.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김두영 지부장은 사용자와 노동자를 동등한 관계로 보는 시각에서 표준근로계약서를 만들기 위해 협의 중이라고 밝히며 “정부, 제작사 협회 측에 노사정 협의체를 만들자고 제안 해둔 상태다. 이번에는 반드시 방송사가 참여하는 노사정 협의체가 돼야 한다. 그동안 환경 개선 TF팀이 여러 번 만들어졌었는데 방송사가 항상 빠졌었다. 이번에는 반드시 방송사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한다. 들어오지 않으면 협의가 무의하다고 보고 있다. 방송사가 빠지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다.

또한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스태프들이 정당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으려면 ‘스태프협의회’를 구성해서 운영해야 한다고 제안하며 “최근 ‘최고의 이혼’은 각 팀별로 대표를 뽑고 대표 중에 전체 스태프가 직접 투표를 통해 대표를 선출했다. 스태프 대표가 제작진과 휴식 시간, 촬영 시간 등에 대해 협의하기 시작하면서 휴식 시간이 늘어나고 근무시간이 줄어들면서 현장 분위기가 좋다는 제보자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이처럼 스태프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가 조금씩 늘어나고 그를 통해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들이 생겨나고 있다.


cultur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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